1893년 3월 11일 보은… 동학혁명의 불씨가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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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년 3월 11일 보은… 동학혁명의 불씨가 피어올랐다
  • 충청투데이
  • 승인 2019년 09월 19일 18시 48분
  • 지면게재일 2019년 09월 20일 금요일
  •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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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평섭의 충청역사유람] 45 東學의 보은 집회
최제우, 전국 돌며 백성들의 고달픔 체험
동학, 희망·위안 돼… 혹세무민 죄로 처형
최시형, 교조신원 전개… 정치운동으로 발전
보은 장안리서 대규모 집회… 관군에 초토화
결집력 확인… 1907년 최제우 명예회복으로
▲ 충북 보은에 있는 동학농민혁명군 위령탑. 보은군 제공

최제우(崔濟愚)는 1824년에 태어나 1864년 대구에서 처형될 때 까지 겨우 40세를 살고 간 극적인 인물이었다. 호는 수운(水運). 그는 경북 경주에서 태어났지만 청년기부터 전국을 돌아 다니며 도를 닦고 백성들의 고달픈 삶을 온 몸으로 체험했다.

그 시절 조선 사회는 외척과 세도 정치에 부패가 팽배했고 지방 관호들의 횡포로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있었다. 이때 최제우가 내건 동학(東學)사상은 고달픈 백성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위안을 주었고 그리하여 1863년에는 접소가 전국에 14곳으로 늘어 났다. 교세가 빠르게 확산되자 정부가 경계심을 갖기 시작했고 마침내 1864년 1월 18일 교주 최제우를 그의 고향 경주에서 체포했다. 그리고는 '혹세무민'의 죄를 씌워 그해 4월 15일 대구에서 처형했다.

경천(敬天)사상에 유·불·선 신앙이 융합된 '동학' 그 어디에도 혹세무민의 내용이 없었지만 조정에서는 그의 빠른 교세 확장이 가져올 사태를 미리 차단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

최제우의 뒤를 이어 최시형이 교주를 이어 받았는데 그는 최제우의 명예회복을 위한 신원(伸寃)운동을 적극 전개했다. 그리고 동학을 정식 종교로 인정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으나 전라도의 전봉준 등은 여기에 더해 일본과 서양 세력을 몰아내자는 척왜양(斥倭洋)의 슬로건을 내세워 정치운동으로 발전했다. 마침내 1892년 10월 공주에서 집회를 열고 충청도 관찰사 조병식에게 동학을 사교로 몰지 말 것과 교주 처형 후 동학 교인들에 대한 재산 찬탈 행위가 극심해지는 것을 막아 달라고 요구했다.

또 11월에는 전봉준이 중심이 되어 전라도 삼례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고 최제우의 신원은 물론 탐관오리의 제거, 외국세력의 추방 등을 요구하더니 이듬해, 1893년 3월 11일에는 충북 보은읍 장안리에서 2만~3만명이나 되는 대규모 집회를 열기에 이르렀다.

▲ 동학의 보은 집회는 이후 동학농민혁명의 불씨가 됐다. 사진은 올해 보은동학제 모습.  보은군 제공
▲ 동학의 보은 집회는 이후 동학농민혁명의 불씨가 됐다. 사진은 올해 보은동학제 모습. 보은군 제공

보은은 경주, 상주, 영덕 등 경상도 지방에 널리 퍼져 잇는 동학도들이 모이기 편리한 점 등이 고려된 것 같다. 참가자들은 소매 없는 푸른색 두루마기를 입는 등 단합된 분위기를 높였고 장안리 일대에 초막 400여 채를 지어 마치 사단 규모의 군대가 집결한 것 같았다.

또한 장안리 북쪽 옥녀봉 아래에 있는 큰 기와집을 도소로 정하고 대형 깃발을 꽂았으며 집회장 주변을 허리 높이의 성을 쌓아 병영을 방불케 했다. 그리고 봉우리 마다 인원을 배치시켜 관군이 진입 시 깃발로 신호를 보내도록 했다.

그야말로 긴장되고 삼엄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호조참판 어윤중(魚允中)이 4월 1일 선무사가 되어 장위영 군대 600명을 이끌고 보은에 나타나자 상황이 급변했다. 어윤중이 해산을 명하는 칙유문을 동학지도자들에게 낭독하자 교주 최시형은 손병희 등 북접지도자들과 함께 교단의 와해가 두려워 현장을 빠져 나갔다. 교주가 사라지자 교도들도 하나 둘씩 자리를 떴고 강경노선을 주장했던 남접 측 지도자들도 모습을 감출 수밖에 없었다.

동학교도가 아니면서도 사회에 불만을 갖고 참여했던 젊은이들도 모두 헤어졌다. 그러자 곧이어 진입한 관군은 도소가 설치된 집은 불태우고 동학도들이 세운 초막들도 모두 초토화 시켰다.

이렇게 동학의 보은 집회는 무위로 끝났지만 여기서 확인된 결집력이 불씨가 되어 1894년 동학농민혁명으로 이어 질 수 있었던 것.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바라던 교주 최제우의 신원도 1907년 얻어 낼 수 있었다. 그래서 동학의 보은집회 의미가 큰 것이다. <전 세종시 정무부시장·충남역사문화원장>

▲ 동학의 보은 집회는 이후 동학농민혁명의 불씨가 됐다. 사진은 올해 보은동학제 모습.  보은군 제공
▲ 동학의 보은 집회는 이후 동학농민혁명의 불씨가 됐다. 사진은 올해 보은동학제 모습. 보은군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