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균 대전도시공사 사장

바야흐로 가을이다. 절기상으로는 입추(立秋)가 지나면 가을이지만 우리나라 기상청은 ‘9일간 일평균 기온 평균값이 20℃ 미만으로 내려간 후 다시 올라가지 않은 첫날’을 가을의 시작으로 정의하고 있다. 보통 9, 10, 11월 3개월을 가을로 보는데 기후변화에 따른 기온상승으로 가을이 점점 짧아지는 느낌이 든다.

음력으로는 7월을 가을의 시작으로 여겨서 소동파(蘇東坡)의 절창(絶唱)인 적벽부(赤壁賦)는 ‘임술년 가을 7월 보름 다음 날(壬戌之秋 七月旣望)’로 시작하는 첫 구절이 유명하다. 7월이 가을의 시작이라서 음력 9월을 가리키는 구추(九秋)는 늦가을을 의미하면서 중의적으로는 인생의 황혼기를 말한다. 보통 회갑 전후를 의미했었는데 100세 장수시대인 지금 인생의 구추는 새로운 정의가 내려져야 하겠다.

"봄볕에는 며느리 내보내고 가을볕에는 딸 내보낸다"는 속담에서 보듯 가을햇살이 여름은 물론 봄보다도 훨씬 부드럽다. 과학기술부의 블로그에도 가을볕은 자외선 수치가 높지 않아 봄볕보다 일광욕이나 비타민D 합성에 좋다며 굳이 가을볕에 딸을 내보내는 어머니의 마음을 설명하고 있다. 그 부드러운 햇살로 오곡이 맛있게 영글고 산색은 아름다운 단풍으로 물들게 된다.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고 성숙의 계절이다. 벼가 익을 수는 있어도 더 자라지는 않는다. 그래서 릴케는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허락하시어 마지막 과일이 익게 하시고 단맛이 포도주에 스미게 하소서"라고 기도했다. 더 굵고 더 많은 포도송이가 열리게 해달라고 기도하기에는 이미 늦은 계절이기 때문이다. 간밤에 무서리가 저렇게 내려 잠도 이루지 못한 미당(未堂)이 신새벽에 마주한 것은 그저 노랗게 피어있는 국화 한송이가 아니라 고통과 시련을 이겨낸 성숙한 사랑과 자아였다.

天高馬肥(천고마비), 月白風淸(월백풍청), 刻露淸秀(각로청수), 燈火可親(등화가친) 등은 모두 가을을 나타낸다. 앞의 셋은 가을의 정취와 풍경을 말하는 반면에 등화가친(燈火可親)은 좀 다른 유래가 있다.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명인 대문장가 한유(韓愈)도 자식 교육은 걱정이어서 공부하러 집을 떠나는 아들에게 시를 한수 지어준다. 그 시의 한구절이 "들판에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니 등불 가까이 책읽기 좋다. 新凉入郊墟(신량입교허) 燈火稍可親(등화초가친)"이다. 한유의 아들이 아버지 뜻을 받들어 입신양명(立身揚名) 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어찌됐든 여기서 등화가친이라는 말이 유래했고 이후로 가을과 독서는 동전의 양면이 됐다.

한유의 아들에게 독서는 과거시험을 준비하기 위한 공부의 과정이었다면 오늘의 우리에게 독서는 교양과 즐거움이다. 인터넷과 핸드폰에서는 석줄만 넘어도 지루함을 느낀다는 젊은 세대에게 가을이 왔다고 열권짜리 '토지'(土地)나 2000페이지 가까운 '안나카레니나'의 일독을 권하는 것도 쉽지는 않다. 성찰의 시간이니 새로운 세계와의 만남이니 하는 독서예찬이 얼마나 진부하게 들릴지 걱정도 된다.

하지만 문자가 생긴 이래도 인류의 진보와 실패, 사랑과 증오, 환희와 슬픔은 책에 담겨 후대로 전해졌고 앞으로도 비슷할 것이다. 사각사각 책장 넘기는 소리와 함께 나의 인격과 사회의 품격도 함께 높아진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살기 좋은 도시가 되려면 여러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소득도 높고 교통도 편리하고 큰 기업도 유치해야 한다. 거기에 한가지 더 해서 내고향 대전이 전국에서 가장 책을 많이 읽는 도시(그런 통계가 있는지 모르겠지만)가 되면 다른 어떤 평가보다 자랑스럽게 여겨질 것 같다. 이 가을 가장 적은 수고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은 역시 한 권의 책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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