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서글픔이 흐뭇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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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서글픔이 흐뭇함으로
  • 충청투데이
  • 승인 2019년 08월 29일 16시 11분
  • 지면게재일 2019년 08월 30일 금요일
  •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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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주형 을지대학교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

한 밤중 딸아이가 잠에서 깼다. 새벽 3시쯤이었다. 딸아이는 다른 방에 자고 있던 필자를 깨워서는 물을 달라고 했다. 마무리할 일이 많아 지난 밤 거의 자정 가까이에 잠들었던 터라 몸은 천근만근, 정신은 비몽사몽이었다. 당장 거절하고 싶었지만 아직 도움이 필요한 여섯 살 아이였기에 차마 그 부탁을 뿌리칠 수 없었다.

그래서 피곤한 몸을 간신히 일으켜 냉장고를 열고 물병을 꺼내어 물을 컵에 담아 준 후 가능한 빨리 잠자리로 돌아가라는 말을 건네고는 필자는 바로 잠자리로 돌아왔다.

그런데 물을 다 마신 아이는 자신의 잠자리로 가지 않고 필자 옆에 와서 누웠다. 아빠랑 자고 싶은 마음이겠거니 싶은 생각도 잠시, 아이는 갑자기 등을 긁어 달라고 했다. 평소 잠들기 전 등을 긁어달라는 부탁을 종종 하던 아이인지라 사실 특별할 것도 없는 요구였지만, 육체적, 정신적 피로가 심했던 탓이었는지 그날따라 아이의 요구가 유난히 귀찮게 느껴졌다. 그래서 마음으로는 미안했지만 이해해 주길 바라는 심정을 담아 '지금은 아빠가 너무 피곤해 힘들다'는 한마디로 그 부탁을 거절했다. 불만 섞인 아이의 징징거리는 소리에도 필자는 애써 마음의 귀를 닫고 못 다한 잠을 청하였다.

날이 밝았다. 잠에서 깨어 옆을 보니 아이는 새근새근 소리를 내며 자고 있었다. 한 밤중의 일은 언제 그랬냐는 듯 평안한 모습이었다. 잠시 그랬으려니 여기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출근 준비를 하고 있는데, 그 사이 잠에서 깬 아이가 욕실에서 세안 중이던 필자의 옆으로 다가왔다. 평소 출근 전 얼굴 보기가 쉽지 않은 터라, 반가움에 일찍 일어난 아이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아침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무덤덤한 표정으로 우두커니 선 채 필자를 바라보던 아이는 아침인사에 답하기는커녕 "아빠, 왜 밤에 등 안 긁어 줬어?"라고 불만을 토로하는 것이 아닌가. 순간 정적이 흘렀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한 마디 대답 때문에 필자는 무척 당황스러웠다. 필자의 예상과 달리 아이는 한 밤의 상황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말에는 당시 느꼈던 서운함이 그대로 배어 있었다.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는다는 것이 이런 느낌일까.

필자는 어떻게든 이 사태를 수습해야 했다. 아이의 질문에 대한 적당한 대응 없이 바쁘다는 이유로 출근을 했다간 서로가 마음이 불편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아이를 앉혀두고 이런 저런 상황을 핑계 삼아 나름대로의 정당성을 피력하는 것은 그럴 충분한 시간도 없을뿐더러 상황만 더더욱 악화시킬 것만 같았다. 만약 가정을 위해 하루하루 고군분투하는 계급장을 이유삼아 일상의 수면이 아빠에게 얼마나 중요한 지를 설명한들, 과연 여섯 살 아이가 고개를 끄덕여 줄까?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에, 필자는 아이의 굳은 표정 앞에 침묵도 잠시, 상황을 최대한 빨리 벗어나기 위해 '아빠가 부탁을 못 들어줘 미안하다'는 사과의 한 마디를 건네고는 집을 나섰다.

조금 서글펐다. 아낌없이 항변하고 싶었지만, 속으로 삼켜야만 하는 현실이 얄미웠다. 또한 이와 유사한 상황은 언제든 반복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나름대로의 대처 방안이 있을까 잠시 고민했지만 왠지 혼란만 가중될 뿐 묘책이 떠오르지 않아 답답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부모라면 응당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사실을 자꾸 외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어린 부모의 티를 벗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보는 것 같아 부끄럽기만 했다.

어느 날 아내가 정수기를 설치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날이 더워지면서 아이들이 물을 많이 마시다 보니 하루에도 많게는 두 번 이상 보리차를 준비해야 할 때가 있다는 이유였다.

필자는 대환영이었다. 미리 준비되어 있었더라면, 새벽에 물을 달라고 아이가 필자를 깨우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불현 듯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때다 싶어 과감하게 투자했다. 물론 아이와 있었던 일은 아내에게 숨긴 채.

이제 아이들이 물을 찾으면 필자는 웃으며 대답한다. '물은 알아서 내려마셔요'라고. 뿐만 아니다. 막내가 물 찾으면 형과 누나가 먼저 챙겨준다. 딸아이와의 그 일이 서글픈 기억이 아닌 흐뭇한 추억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