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박래 충남 서천군수

1920년대 이후 일제는 본국으로의 식량 및 물자 공출을 위해 항구도시 장항을 물류기지로 개발하고 금과 동 수탈을 목적으로 제련소를 지었다. 전망산 정상에 솟은 굴뚝으로 상징되는 장항제련소는 해방 이후에도 우리나라 중공업 발전을 이끌어왔고 일자리를 찾아 나선 사람들을 장항으로 모이게 하는 '등대' 역할을 했다. 시간이 흐르고 전망산 제련소 굴뚝의 연기가 멈추고 금강하굿둑이 세워지면서 잘 나가던 공업도시 장항은 긴 침체기에 접어들게 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장항제련소 주변 토지가 중금속 오염에 노출됐다는 충격적인 소식은 고향에 남아서 농사를 짓던 마을사람들 마저 떠나게 했다. 한때 성장하는 공업도시였던 장항은 이제 개발의 상처만 남은 쇠락한 도시로 전락했다.

정부가 장항 브라운필드 오염 토지를 정화해 주민들에게 돌려주겠다고 약속했던 2009년으로부터 10년이 지났다. 오염부지 정화사업은 마무리 단계에 와 있으나 아직까지 브라운필드가 어떻게 활용될지는 여전히 안개 속이다. 수 년 전, 환경부 택지개발 방식의 계획안이 기획재정부 심의에서 반려된 이후에는 관련 부처에서도 손을 놓은 모양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정부의 약속 이행을 기다리던 서천군이 브라운필드 토지이용계획을 마련하기 위해 충남도와 함께 관련부처를 방문하며 추진의 필요성을 설명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 쯤 되면 드는 질문이 하나 있다. '도대체 장항 브라운필드를 어떻게 개발할 것인가?' 요즘 지자체에서는 대규모 개발사업에 열을 올리고 있다. 특히 제조업 생산기반이 약한 농어촌 지자체는 앞을 다퉈 관광시설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문제는 지역적인 맥락과 관광 수요적 측면에 대한 고려를 생략한 결과, 지역경제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지자체 재정을 궁핍하게 하는 애물단지로 전락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장항 브라운필드를 가치 있고 합리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지역의 환경과 자원 그리고 역사에 대한 학습이 선행돼야 한다. 먼저 장항 주변의 자연환경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금강하구는 UN세계관광기구(WTO)가 세계 8대 생태관광지로 선정한 지역이며 동아시아 및 대양주 철새 이동경로의 중간기착지로서 생태적인 보전 가치가 높은 곳이다. 특히 람사르습지로 지정된 금강하구 갯벌과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는 유부도는 국제적으로 큰 주목을 받는 곳이다. 이러한 자연 환경을 배경으로 인근에 국립생태원과 국립해양생물자원관이라는 국제적 수준의 생태연구 및 전시 시설이 갖춰져 있다.

그리고 장항 브라운필드는 일제 수탈의 아픈 경험과 해방 후 국가에서 운영한 기간시설(제련소)에 의한 중금속 피해의 상처가 남아있는 지역이다. 또 2000년대 이후 지역의 일자리와 인구가 줄고 경기가 침체되면서 주민들이 느끼는 상실감 또한 크다.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장항 브라운필드의 합리적인 개발 방향은 지역의 생태자원을 통해 지역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특히 장항 브라운필드에 또 다시 토공식 개발을 추진하는 것은 경제적으로나 환경적으로 지역에 득보다 손해를 끼칠 확률이 높다.

현 시점에서 장항 브라운필드 활용 방향에 대한 모범 답안은 없다. 다만 기존의 토공식 개발에서 벗어나 장항이 지닌 희귀한 생태자원을 잘 살려 지속적이고 친환경적인 개발이 이뤄질 수 있도록 지역 사회에서 생산적인 공론이 필요하다. 가장 지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이 있다. 다행히 브라운필드 주변에는 람사르습지, 유부도 등 희귀한 생태자원들이 있어 이들을 종합적으로 연계할 수만 있다면 국내를 넘어 국제적인 생태복원 모델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본다.

일제가 세운 제련소에서 나온 중금속 오염으로 얼룩진 장항 브라운필드가 향후 국제적인 생태복원의 모델로 우뚝 서게 된다면 이 얼마나'통쾌한 반전'이 될 수 있겠는가? 장항 브라운필드가 세계적인 생태복원 사례로 손꼽히는 날까지 군 행정의 대표자로서 모든 행정력을 집중해 노력할 것을 약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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