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주 청주시 문화예술과 주무관

2년 전 내 집 장만을 하며 신혼 이후 7년 동안 살던 집의 이삿짐을 정리했다. 그 속에 먼지가 수북하게 쌓인 노트 뭉치가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때인 1993년부터 써 온 일기장이다.

공직에 들어오고 또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정신없이 살면서 잊고 있었던 어릴적 꿈과 희망, 그리고 어려움을 극복해가는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나만의 기록장이다.

'기록'이라는 어원 자체가 주는 느낌 때문인지, 기록이라고 하면 과거 역사, 유물 이런 단어가 연상이 되고 과거에 매몰돼 있다는 지적이 있다. 그렇지만 기록은 과거에 한정되지 않는다. 이순신 장군은 전란이 한창이었던 임진왜란 7년 동안 전쟁준비 과정과 전략 전술, 개인적인 아픔과 심정까지 소상하게 기록으로 남겼다. 난중일기는 현대까지 해군전략과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는 소중한 자료가 되어 주고 있다. 미국 해군사관학교에서는 이순신 장군의 해전 기록을 토대로 해전 전술을 가르치고 있으며, 장군의 가장 치열했던 전투를 영화화한 '명량'은 1700만명이 넘는 관객을 불러모아 엄청난 부가가치를 창출한 바 있다.

가까이 우리 청주만 해도 100년 전 청주 상신리에 사셨던 진주 강 씨 문중의 며느리가 작성하신 민간 조리서인 ‘반찬등속’을 근간으로, 옛 선조들이 드시던 음식을 재현해 현대인들의 건강식으로 재탄생시키려 하고 있다.

모차르트의 고향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는 매년 900만명이 넘는 관광객들이 모여든다. 220여년 전에 타계한 과거 모차르트 음악 기록이 남아있고 또 그런 흔적을 만나기 위해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찾는 것이다.

과거의 결과물인 '기록'도 우리가 어떻게 현대적 의미로 재창조하느냐에 따라 현재와 미래의 소중한 자원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의 대표적인 미래 전략산업은 인공지능(AI) 기반 산업이다. 인공지능의 기반은 데이터 즉 기록 자료에서 나온다. 기록이 모여 정보가 되고 정보가 융합돼 지식이 되며, 지식이 생명력을 가지면 지혜가 된다. 왓슨이나 알파고 같은 인공지능도 지금까지 인류가 축적한 데이터 즉 기록물을 전산화해 융합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데이터 즉 기록은 4차 산업혁명시대의 석유라 불린다. 4차 산업혁명이 진화될수록 기록이 경쟁력이 된다.

산업과 경제적 가치가 아니더래도 기록하는 습관은 개인의 행복을 살찌우고 경쟁력을 키우는 데 일조할 것이다. 사랑의 마음이 충만할 때 썼던 연애편지와 일기,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한 흔적이 남은 사진이나 영상물은 금전적으로 평가될 수 없는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유럽에 음악이 넘쳐 흐르는 도시가 있다면 대한민국에는 시민들의 소중한 기록들이 시민 삶 속에 녹아들고, 따스한 정을 느낄 수 있는 기록문화도시가 있다. 기록을 테마로 콘텐츠를 발굴하고 관광과 연계지어 지역 경제를 살찌울 수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청주시에 살고 있는 시민들이 일상에서 소소한 행복을 남기는 것을 도와주고 또 기억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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