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수 공주대학교 교수

요즘 반일(反日)선동을 일삼는 사악한 인간들이 이순신을 자주 인용한다. 오랫동안 이순신 연구에 몰두해 온 필자에겐 그들의 발언이 가소롭게만 느껴진다. 그것은 이순신을 활용해서 또 다시 국민들을 현혹시키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조일(朝日)전쟁 이후 오랫동안 가시덤불 속에 방치되었던 고독한 인간 이순신을 발굴해서 성웅으로 자리매김한 분은 고 박정희 대통령이다. 그는 18년의 집권기간 동안 충무공탄신일(4월 28일·실제 생일은 음력 3월 8일)을 14번이나 챙겼을 만큼 이순신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좋아했다.

현충사관리소장도 현재는 5급 사무관이 맡고 있지만 당시는 대통령이 신임하는 1급 고위관료가 가는 노른자 보직 중 하나였다. 심지어 현충사관리소장이 충남도지사 보다도 끗발이 훨씬 세다는 얘기까지 나돌았을 정도다.

필자는 이순신의 위대함을 ‘불패신화’가 아닌 다른 측면에서 찾는 사람이다. 1590년대 조선 조정의 연간 총 조세수입은 쌀 68만석이 전부였다. 참고로 1593년 명나라 이여송 군대 4만 3000명이 1년 동안 먹어치운 쌀이 48만석이었다. 이율곡이 선조에게 올린 상소문 ‘만언봉사’를 보면 ‘중앙(한양)직 장수에게는 녹봉을 지급했지만 지방직 장수에게는 그것을 줄 수 없다’라는 얘기가 나온다.

이는 여수와 한산도에서 수군지휘관으로 근무했던 이순신도 무보수로 근무했다는 얘기다. 그런 상황에서 한심한 조선 조정이 부대 운영과 무기제작에 필요한 군자금을 지원했을 리 만무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동양 최고의 강력한 수군 전력(戰力)을 창출해냈다.

조일전쟁 당시 조선군 병력현황에 대해 상세히 언급한 사료는 유성룡의 전쟁보고서인 ‘진시무차(1594년 4월)’다. 거기에 따르면 현역 복무 군인 수는 8000명, 현역 명단에 등록된 군인 수는 3만 9000명이었다.

그는 또 다른 보고서(1598년 1월)에서 “병사들은 무기와 식량을 스스로 준비해서 전쟁터에 나가는 실정”이라고 고백했다. 이는 이율곡이 ‘만언봉사’에서 ‘지금 조선은 나라가 아니다!’라고 절규했던 그 모습 자체였다. 그런 상황에서도 이순신은 최정예수군 1만여명을 양성해낸 불세출의 리더였다.

그는 부패하고 무능한 임금과 조정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군자금을 조달했다. 청어잡기, 소금 굽기, 질그릇 제작, 둔전을 통한 군량미 확보가 그것이다. 그렇게 만든 돈으로 무기제작과 군사훈련에 몰두하며 부하들을 잘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데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도 ‘난중일기’에는 추위와 배고픔에 떠는 병졸들을 지켜보며 마음 아파하는 그의 인간적인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그는 ‘쇼통’이 아닌 민관군의 ‘소통’을 중시했고, 아들 조카들과 함께 전쟁터로 나섰다. 자기 참모는 해당분야의 최고 전문가만을 발탁해서 전력 극대화를 도모했다. 또 ‘전투는 군인이 하지만 전쟁은 백성들과 함께 해야 이길 수 있다’는 신념으로 국민대통합을 추구했던 수군총사령관이었다.

이순신, 그 존귀한 이름을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그는 권력농단, 안보해체, 경제파탄, 외교 및 인사참사, 백성무시 등을 가장 혐오했던 분이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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