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범수 ETRI 기술상용화센터장

오랜만에 패스트푸드점을 방문했다. 가게는 젊은 사람들로 가득하다. 점원에게 주문하려다 문득 자동주문기 앞에 줄을 길게 선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상했다. 점원에게 금방 주문할 수 있는데도 자동주문기를 선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이 아들 또래의 청소년이었기에 마침 옆에 있던 아들에게 이유를 물어봤다. 생각이 필요치 않은 듯 금세 대답한다. “사람하고 대화하는 것보다 자동주문기가 훨씬 편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요즘 아이들은 사람하고 말하는 것 싫어해요. 문자라면 모를까?”

필자의 기억으로 패스트푸드점에 자동주문기가 설치되기 시작한 때는 비교적 오래전 일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주문한다는 것은 어쩌면 매우 희귀한 ‘사건’ 같은 것이었다. 호기심에 한 번 쳐다보는 정도였지 굳이 이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다 최저임금이 조금씩 오르고 주 52시간 근무제가 도입되면서 늘어나더니 어느 곳을 가든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됐다. 아예 그것으로만 주문받는 가게들도 생겨났다. 자동주문기를 생산하는 업체에서는 이렇게 홍보할지도 모르겠다. “이 자동주문기는 하루 24시간 근무를 시켜도 불만하지 않습니다. 임금을 올려 달라고도 주휴 수당을 달라고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노조도 파업도 없구요. 한 대 들여놓으면 여러 사람의 몫도 기꺼이 해 줄 것입니다.”

이렇게 다들 좋다는데 음식을 사서 나오면서 필자는 왠지 마음이 불편했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사람의 몫은 계속 줄어들고 기계가 그 자리를 차지하는 세상으로 바뀌는 것이 과연 우리가 꿈꾸던 세상인가? 하지만 요즘 젊은 세대에게 이렇게 말하면 바로 이런 반응이 돌아올지 모르겠다. “여기 꼰대 한 명 추가요!”

역설적이게도 내가 얼마 전 다녀온 독일에서는 이런 부류의 꼰대가 넘쳐났다. 넘치는 정도가 아니라 그들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독일이 어떤 나라인가? 제4차산업혁명의 메카가 아닌가. 그런데 거기서 만난 세계적인 글로벌기업 지멘스, 보쉬, 벤츠를 비롯해 세계최대의 비영리 인공지능연구소인 독일인공지능연구소의 리더들은 한결같이 사람 중심의 기술개발을 말하고 있었다.

“인공지능, 빅데이터, 클라우드, 사물인터넷 등 흔히 제4차산업혁명의 기반기술이라 불리는 것들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결코 사람의 대체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을 더 사람답게 도와주는 보완재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되도록 끊임없이 연구하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필자가 그들의 입을 통해 전달받은 한결같은 메시지였다. 그들이 필자에게 보여준 제4차산업혁명의 산물들도 ‘말 그대로’였다. 지멘스는 전 세계에서 가장 앞선 스마트공장인 암베르크 공장을 보여주며 지난 9년 동안 단 한 명의 노동자도 인위적으로 감축하지 않았음에도 9배의 생산성을 높였다고 자랑했다. 보쉬에서는 증강현실(AR)의 도입을 통해 노동자가 수십, 수백 개의 부품을 한 번의 실수 없이 조립하고 있다고 하고, 벤츠 자동차 생산 라인에서는 엄청난 무게의 자동차가 공중에 매달려 왼쪽 오른쪽 위쪽 아래쪽으로 움직이며 노동자가 가장 편안한 자세에서 작업에 임할 수 있게 도와주고 있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아마도 그들이 역사를 통해 배운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기술이 가져다줄 효율만을 생각하는 방식으로는 절대 도달할 수 없는 부분이다.

2019년은 대전이 4차산업혁명특별시로 선포된 해이다. 정부와 대전시는 대덕연구개발특구를 재창조해 제4차산업혁명이 꽃피는 거점으로 만들겠다는 야심찬 포부도 밝혔다.

하지만 기술만으로는 부족하다. 진정한 제4차산업혁명은 사람에서 시작함을 잊지 말고, 대전에 사는 모든 사람이 지혜를 모아 기술을 자랑하는 대전이 아니라 ‘사람이 먼저’인 4차산업혁명특별시로 만들어가야겠다. 훗날 기술이 사람을 대체하고 나서 아우성이 터질 때 뒤늦게 후회하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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