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우는 평강과 잘 웃는 온달…결혼 후 온달은 전쟁서 공 세워
단양 일대 고구려·신라 ‘요충지’ 온달, 둘레 1523척 성산성 개축
신라군과 전투중 아차산서 숨져 평강공주도 슬피울다 세상 떠나

고구려 25대 평원왕에게 딸이 하나 있었다. 평강공주. 얼굴도 예쁘고 학문에도 뜻이 깊었으나 잘 우는 것이 흠이었다. 어려서부터 그렇게 잘 울었다. 그래서 임금은 "너는 잘 우니까 바보 온달에게 시집을 보내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해 왔다.

마침내 공주 나이 16세가 되어 권력가 고(高)씨 집안으로 시집을 보내려고 하는데 공주는 완강히 거부했다. “어려서부터 바보 온달에게 시집을 보낸다고 했으니 그 말씀을 어기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래도 임금이 뜻을 굽히지 않자 몰래 궁궐을 빠져 나와 바보 온달에게 달려갔다. 귀걸이, 목걸이 등 많은 패물도 가져갔음은 물론이다.

바보 온달은 평양 근교에서 눈 먼 어머니와 함께 가난하게 살고 있는 착한 젊은이였다. 가난하고 얼굴도 추남인데다 누가 때려도 허허 웃는 버릇이 있어 '바보 온달'이라고 불렀던 것. 평강공주가 잘 우는 버릇과는 반대로 잘 웃었다는 것이다.

공주는 처음 부부가 되기를 거부하는 온달을 달래고 눈 먼 온달의 어머니를 설득해 마침내 부부가 됐다. 그리고 궁궐을 도망쳐 올 때 가져온 패물을 팔아 활과 창을 사고, 날쌘 말을 사서 무술을 배우게 했다. 무예에 소질이 있던 온달은 마침내 여러 전쟁에서 공을 세우게 된다. 특히 당시 중국의 후주 무제와의 전쟁에서 크게 이겼으며 온달은 '대형'(大兄)이라는 벼슬가지 받았고 왕은 그를 정식 사위로 맞아 들였다.

이 무렵 신라는 남한강을 다라 서해를 건너 중국과 교류하는 루트를 확보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다 보니 충청북도 단양군을 에워싸고 흐르는 남한강과 죽령 일대는 신라에게 매우 중요한 전략적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고구려도 마찬가지. 험준한 소백산맥의 중심, 높이 689m나 되는 죽령은 충청북도 단양군과 경상북도 영주시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데 고구려로서는 이곳을 빼앗기면 신라의 위협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때 온달장군이 나섰다. "내가 죽령 땅을 회복하지 못하면 살아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영양왕 1년이었다.

온달은 먼저 '온달성'이라 부르는 충북 단양군 영춘면의 성산성을 개축했다. 해발 323m의 성산성은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둘레 1523척에 높이가 11척의 돌로 축성돼 있었는데 지금도 기왓장과 토기가 발굴되기도 한다. '단양8경'과 함께 아름다운 '온달성'이다.

온달장군이 이끄는 고구려군은 처음 잘 싸웠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신라군의 증원군이 늘어나고 공격도 강화 되면서 고구려군은 쫓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군분투하는 온달장군에게 비 오듯 화살이 쏟아졌다. 마침내 온달은 지금의 아차산 아래에서 숨을 거두었다. 서기 590년.

평강공주는 남편의 전사 소식을 듣고 전쟁터까지 쫓아와 시신을 수습했다. 그리고 평양에 돌아가 슬피 울다가 세상을 떠났다. 푸른 물빛의 남한강이 아름답게 에워싸고 흐르는 죽령 나루터. 힘겹게 고개를 넘는 구름을 보면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수채화처럼 젖어 온다.

[변평섭의 충청역사유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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