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재섭 대전시립무용단 예술감독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귀천 천상병

무엇이 그토록 아름다웠을까? 혹여 천상병이라는 이름 석자를 모른 채 시를 접했다면 그저 그렇게 잘 포장된 세상사 넋두리쯤으로 치부됐을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의 해맑은 웃음을 담고 있는 사진이 모진 고문후유증의 그림자를 역설적으로 보듬고 있다는 사실 앞에서 가슴 한구석이 한없이 먹먹해진다.

‘동백림 사건’의 동백림은 동베를린이라는 서구의 지명을 한자식 어감으로 매스컴에서 환치시켜 명명한 것이다.

5·16 쿠데타라는 태생적인 정통성의 부재와 1967년 6·8 부정선거 등으로 민심을 잃고 곤혹스런 처지에 빠져 있던 당시의 정권은 전환국면의 일환으로 교수, 유학생, 음악가, 화가 등 약 200명을 검거하며 대규모 간첩단 사건을 조작하기에 이른다. 이들은 공산국가 동독의 수도였던 동베를린을 거점으로 북한의 대남공작에 협력하였다는 죄명을 뒤집어씌웠으나 여기에 천상병 시인을 옭아맨 것은 참으로 어불성설이었다.

이에 비해 당대 세계적 예술가로서의 지명도를 얻고 있던 작곡가 윤이상과 이응노 화백의 이름은 세인들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으며 두 사람은 그들이 활동했던 독일과 프랑스의 강력한 항의로 비교적 짧은(?) 형을 마치게 된다. 이후 두 예술가는 머나먼 타국에서 예술혼을 불태우며 세계적인 예술가로서의 이름을 당당히 아로새겨나갔다.

그리고 40년이 지난 지금 나는 윤이상의 ‘공후’를 들으며 이응노 미술관 앞에 서 있다. 대전방문의 해를 기념하여 나에게 임명장을 건네준 시의 부탁도 부탁이려니와, 개인적으로 지역의 대표성을 띤 이야기를 브랜드화하는 것도 당연한 의무라 여겨진다.

나는 안무작업에 있어 늘어선 무용수들의 긴 줄에 시간차·무게감·순서배열 등을 이용하여 도미노같이 보여지는 장면을 자주 사용한다. 이 대목에서 묘하게도 이응노의 작품 중 ‘군상’이라는 연작시리즈가 겹쳐져 온다. 표정없는 수묵의 군상들이 팔을 벌려 손을 맞잡은 역동적이고 반복적인 흐름의 그림이다. 대부분의 안무자들이 이응노의 ‘군상’을 보노라면 자신의 안무패턴과 매우 비슷한 느낌을 가지게 될 것이다.

움직임의 기록이라는 것이 최대한 육신의 사지에 생명력을 불어넣어야 나중에 노트를 열어 봤을 때 기록 당시의 정서까지 유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 눈에는 살아 춤추는 듯 얼굴 없는 이응노 군상들에서 다양한 표정마저 유추해 낼 만큼의 약동감이 전해지고 있다는 느낌이다.

몇 달 전 대전에서 올렸던 나의 ‘사계’라는 작품에 대해 ‘이응노의 군상 작품들과 많이 닮아있다’는 전언 또한 약간 억지스럽기는 하지만 향후 내 창작활동의 운명성을 부여하고 있는 듯싶다.

예술가의 작품은 시간과 사건을 거치며 변화하고 발전한다. 그리고 세상을 빗대고 조탁하며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간다. 그 방식은 현실에의 적극적인 참여의 양상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아니면 한 발짝 물러서 자신만의 이상향을 차곡차곡 구축해 나갈 수도 있다. 문제는 예술가란 모름지기 무엇을 이야기해야 할 것인지에 앞서 인간과 세상을 정확히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시인 천상병은 전처럼 맑고 천진한 마음 담뿍 담은 시를 쓰다가 1993년 4월 28일, 고단했던 ‘소풍’을 끝내고 하늘로 돌아갔다. 그는 늘 세상이 아름답다고 노래했지만, 그가 살았던 그 시절은 과연 아름다운 세상이었을까? 이제는 달리 묻고 싶다. 당신의 세상은 아름답습니까? 당신의 소풍은 지금 어떠합니까?

저작권자 © 충청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