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원 청주시 청원구 건설과 관리팀장

지난 1933년 10월 일본 나라현 동대사(東大寺)에 옛 일본 왕실 문서 보관창고인 정창원(正倉院)에서 보관 중인 화엄경론의 경질(불경을 여러 권 묶는 책보)을 보수하던 중 경질 내부를 감싸고 있던 종이에서 우연히 한자 해서체로 작성된 고문서가 발견됐다.

이 문서는 바로 학창시절 국사시간에 한 번쯤은 들어본 신라촌락문서 혹은 신라 민정문서로 불리는 것으로, 9세기 통일신라시대인 816년 또는 876년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문서가 우리에게 남달리 소중한 것은 문서의 배경이 우리 고장 청주로, 당시 서원경(西原京) 근처에 있는 4개 촌락에 대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가로 58㎝, 세로 29.6㎝ 정도의 닥나무로 만든 종이 2매에 서원경에 속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현(縣)의 관할 아래 있던 사해점촌(沙害漸村)·살하지촌(薩下知村)과 이름을 알 수 없는 모촌(某村)과 서원경(西原京)의 직접 관할 아래 있던 이름을 알 수 없는 모촌(某村) 등 4개 촌의 사정이 해서체로 기재돼 있다.

신라촌락문서는 4개 촌락의 이름, 마을의 영역, 호구의 등급, 인구, 가축, 토지, 수목, 호구의 감소, 가축의 감소, 수목의 감소 등의 순서로 기록돼 있다. 이 문서에 기재된 마을의 이름은 사해점촌(沙害漸村), 살하지촌(薩下知村) 등이 있으며, 나머지 2개의 마을 이름은 정확하지 않다. 마을의 영역은 단순히 주거지와 경작지만을 계산한 것이 아니라 주변의 산과 강까지 모두 포함하고 있다.

호구의 등급은 노동력을 기준으로 9등급으로 나눴으며,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도 역(役)의 대상으로 기재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인구는 전체 인구수를 비롯한 3년간의 출생, 사망, 이동한 인구를 표기했으며, 노비의 수도 기록하고 있다. 토지는 논·밭·마전(麻田) 등의 총면적을 나눠 기재했다. 수목은 뽕나무·잣나무·호두나무 등을 기록한 것으로, 나무에서 재배되는 생산품 역시 수취 대상이었기 때문에 나무의 숫자를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이 문서는 3년을 주기로 기록을 작성해 자료를 갱신했으며, 삼국통일 후 국가의 부역과 조세 수취의 기준을 마련하기 위해 조사가 이뤄졌다. 즉 노동력과 생산 자원을 파악해 그에 합당한 수취 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신라 왕실의 의도를 알 수 있다. 2장 밖에 남아 있지 않지만, 국가의 대민 지배체제와 농민의 생활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청주는 현존 세계 최고(最古) 금속활자로 간행된 직지의 고장이어서 시민들의 큰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다. 거기에 더해 신라촌락문서는 지금으로부터 무려 1200여 년 전, 통일신라시대 현존하는 유일한 조세자료 문서로서 직지에 못지않은 우리 고장 청주의 자랑으로 내세울 만하다. 비록 신라촌락문서가 일본 절간에서 발견돼 그곳에 여전히 소장돼 있지만 우리 지역 학계의 심도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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