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사랑하는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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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사랑하는 아빠
  • 충청투데이
  • 승인 2019년 08월 01일 17시 15분
  • 지면게재일 2019년 08월 02일 금요일
  •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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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주형 을지대학교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

아빠, 물.', '엄마, 밥.' 아이들의 말이 점점 짧아졌다. 앞 뒤 정황을 따져 보면 대충 그 요구를 파악할 수 있다 하더라도 툭툭 던지는 말투가 귀에 거슬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때로는 앞뒤 잘라 말하는 탓에 정확한 요구를 알 수 없어 짜증이 나기도 했다. 뒷말은 왜 빼먹을까 궁금함은 접어두고 분명히 말해 줄 것을 자주 훈육했지만 그때뿐, 잠시 뒤에 '엄마, 치카치카'가 끝이었다. 말과 글을 왕성하게 배워가는 시기에 접어들었기에 걱정이 됐다. 특히 네 살인 막내를 생각하니 더욱 조심스러웠다.

우리 부부는 고민했다. 아내는 우리 부부가 서로를 존대하는 말을 쓰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부부의 대화를 통해, 그리고 가정에서의 대화가 아이들의 언어 습득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크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이미 이전부터 해보려는 시도는 있어왔다. 우리 부부뿐만 아니라 여느 부부라면 한번 쯤 이러한 고민은 당연히 해봤으리라. 그러나 그때 뿐, 지속하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함을 절감했을 뿐이었다.

필자는 거듭 고민 끝에 그동안 해오다 잠시 중단했던 '잠들기 전 동화책 읽기'를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그런데 책을 골라 막상 읽으려고 드니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난 책들이 대부분이었고, 또 어떤 책들은 글씨가 너무 많아서 읽기가 부담됐다. 아니나 다를까 이전만큼 흥미를 끌지 못했는지 집중은 잠깐, 금방 딴 짓들이었다. 한 권이 부족하다고 두 세권 읽어달라고 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금방 싫증을 내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걱정스런 마음과 함께 그동안 아이들의 책 읽기에 너무 무관심하지 않았나 싶어 부끄러웠다.

하루는 유치원에서 돌아온 큰 아이가 원에서 배운 노래를 혼자서 부르고 있었다. '사랑해요 이 한마디, 참 좋은 말'로 시작되는 동요였다. 처음엔 다른 동요와 크게 다를 게 없으려니 여겨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런데 노래가 반복될수록 가사 하나하나가 되새겨졌고, 그럴수록 마음에 잔잔한 감동이 일었다. 가사에 표현된 대로 자고 일어났을 때, 아빠가 일하러 갈 때, 그리고 일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이 말로 반겨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만으로도 흐뭇했다.

순간 이 말을 생활화 해 보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불현 듯 들었다. 아침 인사할 때, 출퇴근할 때, 나아가 어떤 요구를 할 때 '사랑해요'라는 호칭을 꼭 먼저 사용하도록 말이다. 그리고 전달 사항이나 요구 사항을 말하는 것으로 하면 현재보다 나아질 것 같다는 막연한 기대가 생겼다. 안 그래도 아이들의 언어 순화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던 터였는데 좋은 기회다 싶었다. 그래서 필자는 최근 말 수가 많아지고 있는 둘째 아이에게 먼저 이를 따라하게 했고 요구 사항을 말한 뒤 꼭 '사랑하는 아빠'로 마무리하도록 요구했다. 귀찮다고 거부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염려도 잠시, 아이는 불평 한 마디 없이 곧잘 따라했다. 물론 처음엔 연습이 필요했다. 그리고 잠시 잊었을 때는 '사랑하는 아빠라고 먼저 불러야지' 하고 반복해서 상기시켰다.

참 신기했다. 호칭을 바꾸니까 서로에게 대하는 태도가 훨씬 부드러워졌음은 말할 것도 없고, 이어 나오는 요구사항도 존대하는 말로 표현하게 되었다. '아빠, 물'은 '사랑하는 아빠, 물 주세요, 사랑하는 아빠'로 표현이 바뀌었다. 시간이 갈수록 다양해져서 화장실 갈 때도 이제는 '사랑하는 아빠, 화장실 다녀올게요, 사랑하는 아빠'하고 다녀왔다. 싫어하던 이 닦기도 '사랑하는 아빠, 치카치카 해 주세요, 사랑하는 아빠'하고 정중하게 부탁을 했다. 손을 씻을 때도, 밥을 달라고 할 때도 아이는 동일하게 표현했다.

최근 들어 막내가 말 수가 점점 많아졌고 요구 사항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아직 단어와 문장의 발음은 명확하지 않지만, 그래서 알아듣기 힘들지만, '사랑하는 아빠'라는 표현만큼은 분명하다. 필자의 욕심일까. 막내에게는 다른 표현을 더하고 싶었다. '안아 주세요'와 '토닥토닥'이다. 아빠가 먼저 말하면 아이는 따라하며 필자를 안고, 어깨와 등을 토닥인다. 그 순간에는 세상 그 어떤 것도 대신할 수 없는 행복감에 젖는다. 그래서 필자는 퇴근할 때, 자기 전, 그리고 기분 내킬 때마다 막내에게 이렇게 요구한다. '사랑하는 아빠, 안아주세요, 토닥토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