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하윤 배재대 주시경교양대학 교수

17세기 문인 이응희는 이웃집에서 개를 얻은 뒤에 '강아지 두 마리를 얻고'라는 시를 썼다. 개는 무심한 동물이 아니라서 닭과 돼지와는 비교할 수도 없고, 예전에 집에 묵었던 손님은 잘도 기억해 내며, 어두운 밤이라도 지나가는 낯선 손님을 잘 가려서 여지없이 짖어댄다는 내용이다. 또한 짐승을 잡는 재주도 매우 민첩하고 청력도 뛰어나서 작은 소리도 귀신같이 잘 듣는 영리한 동물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역사 속 이야기에서도 개는 다양한 모습들로 묘사된다. 들불을 끄거나 맹수를 물리쳐서 주인을 구하기도 하고, 독약이나 귀신으로부터 주인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며 주인을 보호하고 목숨을 구하는 충견(忠犬)을 넘어서서 의견(義犬)의 모습으로까지 형상화되기도 한다. 인간도 못하는, 인간보다 나은 동물로 그려지면서 인간들을 비판하거나 인간의 욕망을 대신 투영해서 경계하고자 하는 의도이다.

문학에서는 개를 인간의 '욕망을 경계'하기 위한 동물로 빗댔지만 현실에서는 오래전부터 인간의 보신을 위한 '욕망의 제물'로 이용한 것도 사실이다. ‘예기’에서는 큰 개는 견(犬)이라 하고 작은 개를 구(狗)라 하는데, 구만 식용의 용도로 사용한다고 한다. 개고기를 죽으로 만든 개장국과 삶은 개인 구증은 왕실에서부터 서민들에 이르기까지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우리 조상들이 즐겨 하던 음식이었던 것이다.

‘동의보감’에서는 속을 편안케 하고 혈맥을 조절해 장과 위를 튼튼하게 하며, 양기를 북돋아 기력을 증진시킨다고 했다. ‘산림경제’는 혜경궁 홍씨 환갑상에 황구로 만든 일등품 음식이 올라갔다고 전하며, ‘농가월령가’에는 며느리가 친정을 갈 때 시댁에서 항상 개고기를 선물로 보냈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처럼 과거 전통시대의 개는 우리의 건강을 책임지는 최고 음식이었다고 봐도 무리는 없다.

여름은 개들에게 수난의 계절이었다. 식용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애견인(?)들은 사람(人)이 개(犬)를 먹는 날이 삼복(三伏)의 복날이라는 자기합리화로 일찌감치 군침을 흘리며 입맛을 다시기 일쑤였다. 그러나 올해 여름은 이러한 목소리가 확연히 힘을 잃어가는 분위기다. 개를 식용하는 것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와 사람들의 인식 변화가 감지되면서 개를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고 있는 것이다. 음식문화의 다양성도 존중해줘야 한다고 버티는 소수의 무리들이 있지만, 그 기세도 예전 같지는 않다.

시대가 발전하면서 문화도 변하고, 지구촌의 다양한 먹거리가 공유되면서 음식문화에 대한 인식도 바뀌고 있다. 문화상대주의 관점에서 개고기를 무조건적으로 비판하지 말자는 의견도 이해하지만, 다수의 시선에서 부정적 인식이 감지된다면 재고할 필요도 있다고 생각한다. 과거와는 달리 다양한 대체 음식이 등장했고 위생과 동물권 차원에서라도 개를 식용하는 문화는 지양돼야 하며, 이제는 개를 향한 식견(食犬)이 아니라 개에 대한 식견(識見)이 요구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젓가락은 내려놓고 시민의식은 올린다면 삼복의 복(伏)날이 개들에겐 행복한 복(福)날로 기억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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