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평섭의 충청역사유람] 37 분청사기의 메카 계룡산과 李參平
공주 학봉리, 일제 시절 철화분청사기·도편층 다수 발견
日에 끌려간 조선 도공 400명… 아리타, 도자기 메카 변신
이재황 교수 중심 계룡산 도예촌… ‘분청사기의 부활’ 기대

1927년 일제강점기 시절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일원에서 발굴조사가 진행됐다. 그때 동학사로 들어가는 입구, 산 아래서 미완성의 철파분청사기와 두터운 도편층이 발견됐고 이것들 중 많은 양의 물건이 일본으로 건너가 중요 문화재로 보존됐다. 그 후 우리 정부는 이곳 학봉리를 사적 333호로 고시했으며, 계룡산 북쪽 계곡에는 도예촌이 세워져 이재황 교수 등이 중심이 돼 철화분청사기 메카로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짙은 먹쑥색의 산화철로 그려진 물고기, 새, 초화문(草花紋)… ‘오래보아야 사랑스럽다’는 나태주 시인의 노래처럼 오래 볼수록 철화분청사기는 너무나 한국적이다. 더욱 그 막걸리 색의 은은한 빛은 얼마나 정겨운가! 그래서 세계적인 스페인 화가 피카소는 일본에 왔을 때 로산진이 음식을 담아 내놓은 철화분청사기에 반해 감탄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로산진 자신도 이에 미쳐 계룡산 학봉리에 와서 직접 도요를 만들고 철화분청사기를 구어냈다.

계룡산 철화분청사기 하면 잊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이삼평(李參平). 그는 임진왜란 때 일본에 끌려간 400명의 조선 도공들을 대표하며, 일본인들을 그의 눈부신 업적 때문에 신(神)으로 받들어 ‘도신(陶神)’으로 추앙해 신사(神社)까지 만들었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일본 도신이 되게 했는가? 조선 도공들이 일본에 끌려 오기 전까지 일본인들의 밥그릇은 대나무를 자른 것이나 나무 속을 파낸 것을 사용했고 중국이나 조선에서 들어온 사발 같은 것은 영주들이나 일부 무사들만 갖고 있었다. 그러니 @삼평 등 조선 도공들의 손에 의해 분청사기가 생산된 것은 가히 혁명이라 하겠다.
 

물론 그들이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이렇게 도요 작업이 시작된 것은 아니다. 도자기를 만들 흙 - 백토(白土)가 없었다. 그래서 20년에 걸쳐 일본 전국을 누비며 흙을 찾아 헤맸는데 결국 사가현에 있는 아리타(有田)에서 흙을 발견해 계룡산 학봉리에서 만들던 분청사기를 재현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1616년, 그러니까 일본 도자기의 역사가 조선 도공들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그리하여 아리타는 지금까지 400년 동안 일본 도자기의 메카가 됐으며, 인구 2만의 이 작은 도시에 1400개나 되는 도요가 매일 불음 뿜고 있다. 여기에 쓰일 백토를 캐느라 산 하나가 거의 사라질 정도니 모든 것을 미뤄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산 하나가 없어질 정도의 흙으로 빚은 분청사기는 다 어디로 갔을까? 물론 일본 국내에 대부분 공급됐으나 엄청난 물량이 도자기 문화가 초라하던 유럽으로 수출됐다.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을 석권했으며 당시 유럽과 아시아의 무역을 장악하고 있던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일본 나가사끼에서 유럽으로 실어 나르는 역할을 했다. 따라서 일본은 도자기 수출로 엄청난 돈을 벌게 됐고 그 자금이 유럽의 문명을 흡수해 일본을 근대화 시킨 ‘명치유신’의 밑천이 됐다.

여기서 문득 생각나는 게 있다. 왜 일본은 계룡산 분청사기를 버전 업 시켜 유럽을 석권했는데 그 종주국 조선은 그렇지 못했는가 하는 것이다. 다행이 김정섭 공주시장이 계룡산 분청사기를 산업화 시켜 옛 명성을 되찾는 프로젝트를 지니고 있지만 하루 속히 일본 ‘도신(陶神)’의 위치에 까지 오른 이삼평의 땀과 혼이 깃든 우리 계룡산에서 ‘분청사기의 부활’이 이뤄지길 고대한다. 또한 일본이 경제 보복에 나서기에 앞서 과거 역사를 되새겨보는 겸손함도 보여주길 바란다.

<전 세종시 정무부시장·충남역사문화원장>

☞사진제공= 골프존 파운데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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