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희봉 시인·효문화신문 명예기자

'엄마'라고 부르니 소년이 쓰는 글인 줄 착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돌아가실 때까지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고 '엄마'라고 불렀다. 엄마도 좋아하셨다. 낼모레면 엄마가 돌아가신 지 21주년이 된다. 5년 전부터는 큰댁에서 제사를 지내지 않고 산소로 찾아간다. 종교식으로 하다 보니 나에게도 낯설고, 엄마가 자손들이 만든 환경변화에 쉽게 적응하실지도 모르겠기에 내가 안(案)을 내서 그렇게 정했다. 즐겨 잡수시던 음식 몇 가지 준비해 묘소 앞에 펼치고 절을 올린다. 그간 있었던 일에 대해 말씀드리다 보면 생전에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든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엄마를 불렀다. 아픈 허리 추스를 새도 없이 버선발로 마루를 내려오시던 엄마 몸에서는 특유의 체취가 나를 반겼다. 젊은 시절 깨밭에서 일을 하시다 들어오셨을 때의 그 체취가 그대로 남아 나를 편안하게 했다. 남편을 여의고 13년을 외롭게 사셨다. 한쪽 날개를 잃고 얼마나 적적한 삶을 영위하셨을까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래도 평생 남에게 욕 한 번 아니하고, 지나가는 손에게도 물 한 그릇 정성으로 베푸시며 사셨기에 88세 일기로 돌아가실 때에도 큰 고생 아니하고 편안히 눈을 감으셨다.

어릴 때 추억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친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 마늘밭을 파는 형 앞에서 놀다가 쇠스랑에 머리를 찍혀 고생했을 때 이불 솜으로 피를 닦아주며 지혈시키느라 고생하셨던 엄마, 내가 공무원이 돼 첫 출근 하던 날 그리도 밝게 웃으시던 엄마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지금도 내 수첩 속에는 환히 웃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 나를 지켜주고 있다.

저녁을 먹고 나면 밀짚 방석을 펴고 찐 옥수수를 먹으며 바라보는 하늘은 어찌 그리도 푸르렀던지. 별 총총, 추억 총총, 엄마의 사랑 총총. 그때도 엄마는 자식의 종아리를 사정없이 공격하는 모기떼를 쫓아내느라 팔운동을 계속하셨다. 엄마는 가슴에 달을 키웠다. 둥근 달 띄워 놓고 자식을 기다렸다. 전화를 드리면 '언제 올 건데? 바쁘면 그만 두고. 오면 꼭 자고 가거라'라는 말씀을 빼놓지 않았다. 출장길에 고향에 잠깐 들러 인사드릴 때는 좋았지만 내일 출근 때문에 지금 떠나야 한다고 말씀드리면 어찌나 서운해 하셨던지.

엊그제는 친구 어머니 장례식장에 다녀왔다. 일 년 가까이 요양병원에서 고생하셨다. 자식들을 몇 번 불러들이더니 결국은 돌아가셨다. 인생은 참 빠르게 가는 것 같다. 그게 슬프고 안타깝다. 그도 나처럼 엄마 없는 세상을 혼자 노 저으면서 배를 띄워야 하리라.

이부자리 펴주시면서 만족의 미소를 얼굴 가득 그리셨고, 먹는 것만 바라보아도 배가 부르다 하시던 엄마, '노들강변', '달타령' 등을 아들한테 배워 즐겨 부르시고, 자식의 손을 쓰다듬으며 기뻐하셨던 엄마, 비록 일방적 대화지만 엄마 뵐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부풀어 오른다. 더 이상 목소리는 들을 수 없을지라도 나는 세상이 다 무너져도 엄마가 계시기에 그저 행복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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