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지호 청주시 흥덕구 민원팀장

몇 년전 이탈리아 로마를 방문한 적이 있다. 우리는 미세먼지로 몸살을 앓고 있는데 그 시기의 로마 하늘은 맑디 맑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구상 반대편에서 우리나라와 가장 비슷한 기후를 갖고 있는 나라가 이탈리아라고 한다. 기후가 얼마나 좋은지 과일의 당도도 높고 종류도 풍부해 먹는 즐거움도 꽤나 높은 나라였다.

서양 역사는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와 로마에서 출발한다.

오죽하면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이 생겨났겠는가. 고대시대에 세계의 수도로 인정했던 로마였으니 서양사를 공부하려면 로마를 모르고는 논할 수가 없다. 고대의 이탈리아는 도시국가였던 때문인지 도시마다 문화적 가치가 높은 건물과 미술작품들이 즐비하다.

로마는 바티칸시국을 품고 있다.

로마에 가서 성 베드로 대성당을 보지 않았다면 로마를 다녀왔다고 할 수 없을 정도다. 대성당의 건축물부터 내부에 있는 조각상, 그림, 천장 벽화 등 일일이 거론하기 어려울 정도다. 관람객이 무척 많아 작품들을 상세히 볼 수 없는 것이 그저 아쉬울 따름이다.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그 유명한 시스티나 성당이었다. 성당 내부에 그려진 천장 벽화, 미켈란젤로의 작품이다. 당시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성당 벽화 의뢰를 받고는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 거절하려 했다고 한다. 사실 그는 그림보다는 조각가였으며 무엇보다 벽화를 그려본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였다. 그러나 4년의 사투를 거친 결과는 세계의 명작 '천지창조'였다. 이후 6년의 세월을 투자해 '최후의 심판'이라는 또 하나의 걸작을 만들었다. 미켈란젤로의 세계적 걸작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으나 그의 도전정신을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 작품이 바로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이라고 필자는 말하고 싶다.

미켈란젤로가 스스로 인정했듯이 그는 조각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각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림의 세계에서 누구도 범접하기 힘든 명작을 단숨에 탄생시켰다. 최후의 심판을 완성했을 당시 그의 나이는 60대였다. 노력한다고 모두가 천재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노력하지 않은 것보다 노력한 결과는 분명 한 단계 앞설 수 있는 것은 자명하다. 일의 결과를 논할 때 핑계인지 문제점이었는지는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안다.

핑계라면 결과는 어두울 것이고 문제점이었다면 결국은 성공할 것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겠으나 대다수는 그러할 것이다. 즉 일의 성취 결과는 결국 자신의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것이다. 도전은 무엇이 됐든 아름답다. 성공이든 실패이든 도전하지 않고는 아무 결과가 없기 때문이다.

2008년 설날의 마지막 연휴 저녁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숭례문 화재 사건이었다. 그야말로 어이 상실이었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러웠다. 후손들에게도 부끄러웠다. 문화재에 대한 인식 부족의 결과가 아닌가 싶다. 세계의 명작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얼마나 많으냐의 문제도 아니다. 단 하나의 작품이라도 그 가치를 알고 그 가치를 지킬 줄 알아야 한다. 그 결과가 이탈리아와 우리의 현재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듯하다. 물론 지금은 숭례문을 복원 완료했다. 그렇다고 과거의 사건이 지워지지는 않는다. 뼈아픈 교훈이다.

지켜져야 할 문화재는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있다. 한글, 직지, 석굴암, 다보탑 등. 그럼에도 우리는 그 문화재를 홀대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 봐야 한다. 또한 역사의 한 자락을 가득 메울, 어딘가에서 예술혼을 불태우고 있는 그들에게 용기를 줘야 한다. 어찌 알겠는가.

그들의 작품이 미켈란젤로보다 더 뛰어난 작품으로 칭송받을지. 한국인 특유의 뚝심이 언젠가는 지구상 어느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예술의 나라로 거듭날 수 있으리라 꿈꾸며 로마의 아침을 맞이했던 그 순간이 떠올라 글을 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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