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선일체 정책 추진 미나미 총독, 신궁터로 부여 삼충사 자리 찍어
일본 동경 1급신궁과 같은 ‘격’…, 1939년 7월 日 천황 직접 발표
일제, 한반도 최고 관광도시 계획…, 전쟁 길어졌다면 역사 바뀌었을 듯

충남 부여에는 삼충사가 있다.

삼충사는 백제의 충신이었던 성충·흥수·계백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일제가 우리나라를 침략했던 1937년 3월 말살정책을 펴던 미나미 지로 총독은 충남 부여를 찾는다. 부여 백마강, 부소산, 낙화암 등을 하루 종일 돌아보고 지금 삼충사 자리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이 자리야말로 일본이 제국의 차원에서 은밀히 추진하던 '신궁(神宮)'터로 점을 찍은 것이다.

사진=부여 삼충사
사진=부여 삼충사

신궁은 일본 왕실의 조상신인 아미테라스 오미카미를 제사지내는 곳이다.

이곳은 천황을 신격화하고 일본인의 정신을 하나로 만드는 구심체 역할을 해왔다.

일제는 당시 서울 남산에도 신궁을 세웠지만 부여에 세우려는 신궁은 그 보다 격이 훨씬 높은 것으로 일본 동경에 있는 1급 신궁과 같은 격을 부여할 계획이었다고.

천황이 제례에 직접 참여하는 것을 의미하며 부여를 천황이 머무는 '제2의 황궁'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부여 신궁은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조선과 일본을 '같은 조상, 같은 뿌리(同祖同根)'라는 그들 정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의도가 숨어있었다.

니는 조선인의 얼을 완전히 빼앗고 만주와 중국에도 일본 혼을 확산시키려는 중심 역할을 할 생각이었다.

일제의 계획은 점점 현실에 가까워졌다. 부여의 신궁 조성사업은 일본 본국의 궁내선 주도로 급속히 전개됐다. 1939년 7월 31일 히로히또 일본 천황은 직접 라디오 방송을 통해 충남 부여에 신궁을 세운다는 발표까지 했다.

부여 신궁부지는 6만5000평, 지금 대전공설운동장이 체육관을 포함해도 4만5000평인 것에 비해 2만평이나 큰 규모였다.

공사비도 충남도청 신축비가 16만7400원이였는데 비해 부여 신궁은 24만원이나 됐으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당시 부소산 지역은 민가 150호에 인구는 920명에 불과한 촌락이었는데 일본은 이곳에 신궁을 건축하면서 인구 7만5000명의 서울 다음으로 큰 도시를 조성 할 계획으로 시가지 계획도 마련했다. 지금도 부여읍이 읍 단위임에도 도로가 시원스럽게 뚫려 있음은 그때의 자취를 엿보게 한다.

일본과 전국에서 참배객들이 많이 찾을 것을 대비해 부여~논산 간 고속도로도 계획했다.(이와 같은 모든 증언은 고인이 되신 故 홍사준 부여박물관장이 필자에게 증언해 준 것임).

이밖에 서해를 통해 들어 올 참배객을 위해 강경~부여강변도로를 건설하고 민간자본을 유치, 호텔 등 숙박시설을 갖춰 한반도 최고의 관광도시로 만들 계획이었다.

실제 당시 서울의 최고 백화점 '화신'의 소유주였던 박흥식은 이곳에 관광호텔을 지으려고 땅을 사들이기도 했고 마쓰우로라는 부동산 회사는 마구잡이로 땅 매입에 나섰는데 지금도 부여읍 토지대장에는 그의 이름이 많이 등장한다.

그러나 미국과의 전쟁에서 일본이 점차 패퇴하기 시작하자 부여 신궁 공사는 1944년 중반이 되면서 흐지부지 되기 시작했다.

만약 전쟁이 2~3년만 지연됐다면 아마 부여는 최고의 관광도시가 될 뻔했다. 부여가 안고 있는 역사의 아이러니다.

<변평섭의 충청역사유람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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