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변화 속도가 점차 빨라지고 그 와중에서 피로감을 느끼는 현상이 점차 확산되고 있다. 속도와 정밀성을 앞세운 디지털 문화가 이미 사회 모든 분야에 파급되는 가운데 상대적으로 위축된 아날로그 문화에 대한 향수와 선호 또한 세력을 넓혀가고 있다. 오래전 이어령 교수가 진단한 것처럼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조화를 이루는 디지로그 사회의 도래를 우리는 지금 경험하고 있다. e-book이 당초 전망했던 시장점유율에 크게 미치지 못하고 있고 자판 두드리기와 함께 펜은 여전히 애용되고, 영상이 득세한 가운데서도 라디오 방송은 건재하고 있다.

속도감의 와중에서 대중의 관심을 끄는 분야 중의 하나가 악극이다. '불효자는 웁니다', '울고 넘는 박달재',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무정천리' 같은 작품들이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는 현상을 단순한 복고 취향이나 중, 노년 세대들의 현실도피 심리의 표현으로만 해석하기는 어렵다.

인간 정서에 상존하는 원초적 정서와 공감 능력을 자극하고 지나간 시간의 기억을 환기시키는 기능은 앞으로 계속 다양한 형태의 문화콘텐츠로 생산, 유통, 소비될 전망이다. 프로 악극이 지명도 높은 간판스타 한두 명을 앞세운 흥행을 염두에 뒀다면 이제는 아마추어 배우들도 악극에 도전하여 숨가쁘게 지나온 과거를 반추하고 지금의 위상을 확인하는 메시지를 무대에서 펼치고 있다.

최근 (사)한국생활연극협회 (이사장 정중헌)가 대학로에서 공연한 가요극 '꽃순이를 아시나요'<사진>는 우리나라 대중문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징표가 될 만하다. 20명 가까운 다양한 연령대의 시민들이 생업의 틈을 내어 전문 연출가 지도로 석 달여 맹연습을 거쳐 우리사회 근대화 과정의 민낯을 무대에 올린 '꽃순이…'는 6회 공연에 1000여명을 훌쩍 넘는 관객 동원과 함께 아마추어의 한계를 극복하려 나름 분투했다는 평을 받았다. 프로 배우, 전문 가수들이 펼치는 능란한 연기와 가창에는 못 미친다 하더라도 내 가족, 우리 이웃이 펼치는 악극 공연은 관객들의 정서에 다양한 무늬를 그리며 수용되고 이런 관심과 자극이 확산되는 선순환 효과는 고무적이다. 아울러 생활연극이 이제는 공연 성사와 동원 관객 실적에 단순히 만족하지 않고 기량 증진과 완성도 면에서 더 높은 목표치를 세워야 한다는 과제도 함께 주어졌다.

<한남대 프랑스어문학전공 명예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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