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미란 충북무심수필문학회 사무처장

이천 강의를 가는 날이다. 모임에 갔다 도착 시각이 빠듯할 정도에 길을 나섰다. 시동을 걸고 출발하려는 순간 지나가던 행인이 창문을 두드렸다. "저기요, 펑크가 난 것 같아요." 화들짝 놀라 차에서 내렸다. 뒷바퀴에 바람이 반쯤 빠져 있었다. 난감했다. 간신히 주변 카센터로 끌고 갔더니 커다란 대못이 엇비슷한 방향으로 타이어에 박혀 있었다. 임시방편으로 바퀴를 때워 출발했다. 그대로 고속도로를 달렸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어쩌면 그분의 오지랖 덕분에 목숨이 붙어 있는지 모른다.

나는 까칠해 보인다는 말을 곧잘 듣는다. 그러나 그런 외모와 달리 오지랖은 유난히 넓은 편이다. 누가 부당한 일을 당하면 부탁도 안 했는데 앞장서서 따져주고, 남의 작은 어려움에도 마음이 쓰인다. 그래서 오지랖 떠는 여자의 일상은 더욱 더 바쁘다.

오지랖은 겉옷의 앞자락이다. 앞자락이 넓은 옷은 자연이 안에 입은 옷을 많이 감쌀 수 있다. 오지랖이 넓다는 말은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넓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오지랖이 넓다는 것의 경계는 참 모호하다. 나의 오지랖을 앞에 두고 어떤 사람은 정이 많다고 하고, 때로는 마음 씀이 지나쳐 부작용을 일으키거나 오해를 받는 경우도 많다. 어쩌면 상대는 나의 오지랖을 보고 고맙다는 말 대신 '너나 잘하세요'라고 말할지 모른다.

오지랖은 조절 범위에 따라서 착한 오지랖이 되고 미숙한 오지랖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두 오지랖 사이에서 딜레마에 빠지기도 한다. "힘 내세요"라는 말만 해도 그렇다. 얼마 전 지인의 집안에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됐다. 집안일이니 내가 딱히 도와 줄 일도 없다. 하지만 직접 얼굴을 보니 나도 모르게 "힘내세요, 잘 해결될 거예요"라고 전했다. 복잡한 상황의 지인의 입장에선 그 말에 공감이 갈 리가 없다. 고맙다고 하지만 그리 편한 표정이 아니었다. 이러한 말에 기운을 얻는 이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정말 힘든 사람에게 분발을 종용하는 건 진정한 위로가 아니라 미숙한 오지랖일지 모른다. 이기주 작가의 '언어의 온도' 중에서 '헤아림 위에 피는 위로라는 꽃'이란 소제목이 있다. 그 내용 중에 오지랖은 상대 입장을 먼저 느껴 볼 때 정성이 담긴다는 말이 있다. 그렇다. 상대가 절실하게 도움이 필요할 때 상대방을 향해 분위기가 어색하지 않고 부담스럽지 않게 티 내지 않는 배려가 착한 오지랖이다.

요즈음도 나의 오지랖은 시도 때도 없이 발동한다. 그래서 오지랖 접기를 시도한 적이 있다. 백화점에 갔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는데 앞에 중년 여성이 서 있었다, 명품 가방을 든 그녀는 몸매부터 화장까지 어디 한 군데 나무랄 곳이 없었다. 그녀의 뜯어진 치맛자락에 눈길이 갔다. 그냥 모른 척하고 있으면 된다. 그러나 외면하면 할수록 신경이 그곳으로 집중되었다. 무안해할 그분을 위해 오지랖을 접고 나는 2층에서 내렸다. 용기 내어 말해 주지 못한 일이 온종일 나를 괴롭혔다. 완벽하게 차려입고 도도하게 서 있는 그녀 뒤에서 치맛단이 뜯어졌다고 말해 주었더라면 그녀가 고마워했을까? 당황해 했을 것이다 여기면서도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 사람처럼 나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사람들은 사회생활의 윤리적 범위 이상의 것을 하거나, 상대방의 마음을 넘겨짚어서 하는 행동은 모두 오지랖의 범주에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남의 말에 무관심한 것이 결코 미덕은 아닐 터인데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는 점점 그렇게 변해가고 있다.

나의 오지랖 떨기는 계속 진행 중이다. 착한 오지랖 말이다. 그것이 순수한 나이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 중에도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 더 정감이 간다. 각박한 세상 속에서 생각 없이 전하는 마음이 본능에 다가가는 마음일 것이다. 무슨 일이고 참견하고 간섭하는 사람이 사랑스러울 때가 있는 것은 이것저것 재지 않고 그대로 표현해 주는 순박한 마음 때문이다. 오지랖 떠는 여자는 말하고 싶다. 다른 사람의 일에 눈길도 주지 않는 세상보다, 각박한 세상이지만 오지랖을 떨면서 정이 넘치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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