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철 대덕대학교 교수

필자의 집에는 다음과 같은 불문율이 있다. △양말 뒤집어 벗지 않기 △자기가 먹은 밥그릇은 설거지통에 직접 넣기 △화장실에서 반드시 앉아서 소변보기 △집에 들어오자마자 샤워하기 △일요일 오후에는 자기방 청소하기 △자기 빨래는 반드시 자기가 빨래통에 넣기 △외출하고 돌아오면 옷걸이에다 자기 옷 걸어 놓기 등이다. 평소 누구든 이런 규칙을 거역한다면 그것은 우리 집사람 권위에 대한 도전이며, 반란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집안에서는 결코 어느 누구도 이런 규칙을 깨려는 시도나 그런 생각조차 절대하지 못한다. 필자는 집사람에게 결혼식을 마치고 신혼여행을 가는 비행기 안에서 이 규칙을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는 순간까지 철저히 지킬 것을 굳게 맹세했고, 우리 아이들인 큰놈, 작은놈 또한 걸음마를 막 떼기 시작한 순간부터 시작해 지금까지도 철저히 이 규칙을 지키며 살아왔다.

지난 주 일요일 집사람이 결혼 후 처음으로 처형들과 함께 유럽여행을 떠났다. 10박 11일 동안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를 거쳐 스위스까지 돌아보고 온다며 집을 나섰다. 난생처음 이제 우리집안에는 남자들 셋만이 남게 됐다. 그것도 장정들로… 평소 집사람한테 억눌려 지내던… 그래서 한 많은 남자 장정 셋만이 집에 남게 됐다. 집사람이 해외여행을 떠나자마자 나는 두 아들과 회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 셋은 앞으로 10박 11일을 어떻게 하면 알차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했다. 몇 시간에 걸친 열띤 토론 끝에 우리 셋은 드디어 결론에 이르렀다. 집사람이 유럽여행에서 돌아오는 전날까지 완전한 자유를 만끽하기로…. 그래서 집사람이 출발한 그날부터 우리 남자 셋 모두는 집사람이 정해놓은 규칙을 하나도 지키지 않고 자유롭게 살고 있다.

큰놈과 작은놈은 외출하고 돌아오면 씻기는커녕 저녁에 잘 때 양치도 안 하는 것 같았고, 양말 몇 개는 뒤집어져서 식탁위에서 굴러다니고, 설거지통의 설거지는 가득 차다 못해 넘쳐서 씽크대 옆으로 흘러내리고 있고, 모아놓은 음식물 쓰레기에서는 이상한 냄새가 올라오고 있고, 집안 구석구석에는 과자봉지와 아이스크림껍데기가 굴러다니고, 침대위의 침대보는 돌돌 말려서 침대 밑에 떨어져 있으며, 나와 아들 둘이 벗어 놓은 옷들은 침대며 소파며 식탁에 너부러져 있고, 샤워부스에는 쓰고 던져버린 수건이 징검다리를 만들고 있으며, 누렇게 변한 화장실 변기에서는 이상한 냄새가 펄펄 올라오고 있었다.

어떤 때는 나도 정말 이건 아니다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래도 누구하나 잔소리하지 않고 누구하나 터치하는 사람이 없으니, 진정 집사람이 떠난 후 며칠 동안은 살면서 지난 몇 십년동안 우리가 절대 접해보지 못했던 진정한 자유를 느끼는 것 같다. 아주 가슴이 시리도록 후련하고, 내 영혼마저 해방된 느낌이 마치 하늘을 나는 기분이다. 아마도 천당에 있으면 이런 느낌이었으리라! 비록 이 자유가 앞으로 며칠밖에 지속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쓰레기 통속에서 진정한 자유를 맛보고 있는 정 교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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