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평섭의 충청역사유람] 34 세종시 개미고개 전투
전의~전동면 고갯길… 기념탑 우뚝
2차 대전 승리 美, 북한군에 방심
北에 밀려 후퇴… 마틴 연대장 전사
美 멜로이 대령 ‘금강 라인’ 구축
개미고개 전투… 5일간 517명 전사
北 남하 늦춰… 방어선 구축 성공
세종시 해마다 7월 6일 추념식…

▲ 6·25전장 당시 개미고개 전투에서 목숨 바쳐 싸운 이들 덕분에 북한군의 남하 속도를 늦출 수 있게 되었고 금강과 멀리 낙동강에 방어선을 구축할 시간도 벌게 됐다. 지금도 세종시는 해마다 7월 6일이 되면 개미고개에 있는 기념탑 앞에서 이곳에서 산화한 미군들의 영령을 위로하는 추념식을 갖는다. 사진은 지난해 행사 모습. 세종시 제공

세종시 전의면과 전동면 사이를 숨 가쁘게 가로 지르는 분수령이 있다. 개미고개… 구불구불한 고갯길 밑으로 경부선 터널이 길게 뻗혀 있고, 국도1호선(지금은 지방도 614호)이 철로와 교차되어 있는 정상에는 6·25전쟁 때 이곳에서 산화한 미군들을 기리는 기념탑이 있다.

탑 주변에 세워져 있는 미군들의 무장한 모습들과 주변 조형물에서 전쟁이 멈춘 지 70년이 다 되어 가지만 아직도 그때의 짙은 화약 냄새가 바람결에 느껴지는 것 같다.

이곳에서 미국의 젊은 국인 517명이 전사했으며 미처 수습을 못하고 묻혀 있던 39구 시신이 전후 발굴되어 조국으로 돌아갔다.

1950년 6·25가 발발한 이후 처음으로 투입된 미군은 윌리엄 딘 장군이 사단장으로 있는 제24사단 21연대 제1대대 소속 스미스 부대로 406명이었으며, 경기도 오산시 죽미령에서 북한군 제4사단 제107기갑연대 등 3만 명과 대치했다. 미군들은 7월 5일 북한군과 첫 접전을 벌이면서 사실은 북한군을 가볍게 생각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곳에 배치된 미군들 다수가 유럽에서 2차 대전 때 독일군을 물리친 역전의 용사들이었던 때문이다.

그러나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이 압도적인 숫자로 몰려오는 데는 당할 수가 없었다. 결국 60명이 전사하고 82명이 포로가 되는 등 큰 손실을 입고 천안으로 후회했다. 천안에는 일본에서 급히 달려온 미 34연대가 배치되어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괴물처럼 덤벼드는 북한군의 탱크를 막을 수가 없었으며 연대장 마틴 대령이 전사하는 불운까지 겪게 된다.

마틴 대령은 자신이 직접 천안으로 진입하는 북한군 탱크를 향해 바주카포를 발사하는 순간 적의 총탄을 맞고 쓰러진 것이다. 6·25가 발발하고 미군이 참전한 이래 연대장이 전사하기는 처음이다. 연대장을 잃은 딘 장군은 큰 충격을 받고 일본에 있는 맥아더 사령관에게 대전차포의 긴급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이어 병력을 후퇴시켜 개미고개 능선에 진지를 구축하도록 명령했다. 새로 배치된 미군은 괴물 같은 전차38대와 차량 124대를 격파하는 등 혁혁한 전과를 올렸으나 새카맣게 개미고개 일대를 에워싼 북한군의 공세를 667명의 작은 병력으로는 당해낼 수가 없었다. 거기에다 미군은 산악지대 전투 경험이 부족했고 비 때문에 공군기의 지원이 쉽지가 않았다.

결국 미군은 조치원으로 후퇴했다가 다시 대평리와 금강에 전선을 구축했다. 이른바 '금강 라인.' 이때 지휘관은 훗날 주한미군사령관과 UN군 사령관을 지낸 멜로이 대령. 개미고개 전투는 너무도 치열했고 결과는 처참했다. 5일 동안 버티며 싸운 결과 개미고개에서만 전사한 미군이 517명, 그러니까 90% 상당의 병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의 나라 낯선 땅에서 귀중한 생명을 바친 이들 때문에 북한군의 남하 속도를 늦출 수 있게 되었고 금강과 멀리 낙동강에 방어선을 구축할 시간도 번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북한군은 계획대로 부산까지 밀고 갔을 것이고 이 땅은 공산당의 나라가 되었을 것이다. 참으로 상상조차 두려운 끔직한 일이다.

세종시는 해마다 7월 6일이 되면 개미고개에 있는 기념탑 앞에서 이곳에서 산화한 미군들의 영령을 위로하는 추념식을 갖는다.

<전 세종시 정무부시장·충남역사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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