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하윤 배재대 주시경교양대학 교수

삼국시대 조조의 둘째 아들인 위문제가 신하 오질에게 보낸 편지에는 "맑은 샘물에 달콤한 참외를 띄우고, 차가운 물에 붉은 오얏 담가 놓았네(浮甘瓜於淸泉, 沈朱李於寒水)"라는 표현이 나온다. 여기서 '감과(甘瓜)'는 참외, '주이(朱李)'는 자두를 의미한다. 맑고 차가운 물에 참외와 자두를 넣었다는 것은 무더운 여름날에 시원하게 과일을 먹으며 피서를 즐긴다는 의미로 당시 여름의 대표 과일 중에 하나가 참외임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중국의 화북으로부터 들어온 참외는 조선 땅에서도 인기 있는 과일이었다. 연산군은 중국 황제의 생일 축하단인 성절사를 보낼 때에도 참외를 사오라고 명했고, 승정원에서는 참외를 주제로 시를 짓게도 했다. 별미음식을 소개한 해설서인 허균의 ‘도문대작’에서도 "작으면서도 씨가 적고 매우 달며, 의주에서 나는 참외가 맛있다"고 소개했다. 17세기 문신 이응희는 ‘진과(眞瓜)’라는 시에서 참외를 "베어놓으면 금빛 씨가 흩어지고, 깎아놓으면 살이 꿀처럼 달다"며 극찬을 하기도 했다.

참외를 먹을 때 우리는 제일 먼저 꼭지 부분을 떼어낸다. 맛이 써서 먹지 못한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꼭지로 인해 입맛을 상하게 하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참외처럼 과일의 쓴 꼭지 부분은 언제든지 잘라내면 그만이다. 공연히 쓴 맛을 봐야 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우리의 인생살이는 그렇지가 않다. 단맛은 선택하고 쓴맛은 비껴 갈 선택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한마디로 랜덤 인생이다. 본능적으로 인간은 단맛을 추구하고, 단맛은 우리의 뇌를 중독되게 만들며, 단맛을 싫어하면 뇌기능의 문제일 수도 있다는 극단적 언급까지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두 가지가 모두 필요하다는 것이다. 단맛을 보면 쓴맛도 보기 마련이고, 쓴맛을 봐야 단맛의 달콤함도 배가(倍加) 되기 때문이다. 제자백가의 한 사람인 묵자도 '단 참외도 꼭지는 쓴 것처럼, 세상에는 좋기만 한 일은 없다'라는 ‘감과고체’의 이야기로, 참외의 꼭지와 세상일을 절묘하게 빗대 표현했다. 과일의 꼭지는 잘라내면 그만이지만, 인생의 꼭지(?)는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조금이라도 더 편하고 달콤한 인생을 추구한다. 그러나 넘어져봐야 일어나는 법을 알듯이, 인생에서도 비터(bitter)를 맛 봐야 스윗(sweet)한 목 넘김이 훨씬 부드럽다는 것을 깨닫는다. 결국 단맛은 쓴맛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미국의 언론학자 폴 스톨츠는 인간은 지능지수(IQ)에 의해서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역경지수(AQ)가 인생을 결정한다고 했다. 탐스럽고 둥글게 익은 대추 한 알 속에는 무수한 시련과 고통을 견뎌낸 시간이 녹아있다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우리 인간에게도 고난과 시련이라는 쓴맛은 단맛을 맛보기 위한 과정인 것이다. 일부러 쓴맛을 고대(苦待)할 필요까지야 없겠지만, 굳이 고민(苦悶)하면서 힘들어할 필요도 없다. 쓴맛이 강하면 강할수록, 인생의 단맛은 더욱 달콤해지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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