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종합병원 설립 37주년
해방 후 지역서 ‘백제병원’ 개설
의료사각지대서 지역 숙원 해소
한방·노인전문병원 등 추가 개원

[충청투데이 김흥준 기자] 백제종합병원이 올해로 설립 37주년을 맞았다. 이 병원은 노인전문병원과 한방병원을 함께 운영하면서 협진체계를 구축, 양질의 의료서비스 제공은 물론 논산시로부터 시립노인전문병원을 위탁받아 운영하면서 효율적인 의료시스템을 구축, 중부권 최고의 종합병원으로 부상했다. 본지는 이 병원의 설립 배경과 독립운동가였던 이준영 이사장의 부친 故 이덕희 박사(前 이사장)의 일대기를 조명해 봤다.

◆병원 설립 배경

백제종합병원 설립배경에는 이준영 이사장의 부친 故 이덕희 박사가 병원을 운영하면서 시작됐다. 이 박사는 일제시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다 1945년 해방이 되면서 조국으로 돌아와 충남 부여에 자리를 잡고 '익생의원'을 열었다. 당시 이 박사는 부여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에까지 인술의 혜택을 베풀며 지역민들의 신뢰를 얻게 됐다.

하지만 해방의 기쁨도 잠시뿐. 곧 6·25 전쟁이 일어나면서 이 박사는 군의관으로 자원 입대해 일선에서 부상장병을 진료하기도 했으며, 전쟁이 끝나고 안정을 찾아가던 무렵 1961년 부여군수로 임명돼 공직에 몸담기도 했다. 1963년 강경으로 이주한 이 박사는 '한일의원'을 열고 본격적인 의사의 길을 걷게 된다. 이 시기에 지역을 위한 봉사활동에 앞장섰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회활동들로 분주하게 보내면서 지역에서 든든하게 뿌리를 내리는 계기가 됐다.
 

▲ 백제종합병원 전경. 백제종합병원 제공
▲ 백제종합병원 전경. 백제종합병원 제공

 
◆새로운 역사의 시작, 백제종합병원 탄생

故 이덕희 박사는 당시 정부에서 추진 중인 '의료취약지 병원 건립'을 신청, 지정받고 2년여에 걸친 공사 끝에 1982년 5월 4일 마침내 의료법인 백제병원의 시대를 개막하게 된다. 접근성에서 볼 때, 충남 서남부권을 사통팔달로 연결하는 논산에 종합병원을 개설한 것은 이 박사 개인으로서도 오랜 꿈을 이룬 성과이지만, 지역주민들에게도 가뭄 끝의 단비처럼 숙원이 풀린 셈이다.

백제병원 탄생으로 수술을 받기 위해서 대도시로 떠나야 했던 불편 해소와 체계적인 의료 시스템을 체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지역주민들의 기대가 컸던 것. 한정된 의료 수혜 인구로 인한 병원 운영의 한계성 등 어려움이 많았지만 이러한 지역적 특성을 감안, 수진자들이 폭넓은 의료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선진화된 의료 시스템을 구축하려는 백제병원의 노력이 논산뿐만 아니라 충남 중부권과 전북 서북부 일대의 주민들에게 호응을 얻어 개원 2년 후 병원을 증축하고 신경정신과를 증설하는 등 규모와 질적인 면에서 날로 확장일로에 접어들었다. 1991년에는 응급의료센터 지정을 받아 본격적인 응급체계를 구축했고, 1997년에는 2년여의 공사 끝에 여성과 어린이를 전문으로 진료하는 모자보건센터가 준공됐다.

그러나 백제병원의 역사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기록은 노인전문병원과 백제한방병원, 논산시립 노인전문병원 개원이다. 우리나라의 특수한 양·한방 두 가지 의료 시스템을 협진 형태로 통합해 만성 질환과 고난도 질환에 적용, 탁월한 치료 효과를 얻을 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시스템은 당장의 진료성과보다 환자 중심의 열린 진료, 시대를 앞서 가는 진료를 시행한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의료사에 기록될 만한 사건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 1963년 강경 한일의원 시절 병원앞에서 아내와 함께한 이덕희 박사. 백제종합병원 제공
▲ 1963년 강경 한일의원 시절 병원앞에서 아내와 함께한 이덕희 박사. 백제종합병원 제공

 
◆故 이덕희 박사의 독립운동사

故 이덕희 박사는 일제시대때 중국으로 망명, 중국에서 의사로서 첫발을 내딛었다. 이 박사는 1920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용감하고 대담한 성품에 포용력이 뛰어나 친구들 사이에서 늘 지도적인 위치에 서 있었다. 이 박사의 이러한 사람됨은 독립운동을 하던 그의 부친에게서 받은 영향이 컸다. 일제의 탄압으로 투옥돼 옥고를 치르는등 부친은 곧은 성품과 지사적 실천으로 온 몸을 조국의 광복을 위해 헌신한 어른이다.

그러나 부친의 독립운동으로 정작 곤란을 겪은 것은 가족들로 늘 일본 경찰의 감시속에서 탄압을 받으며 생활해야 했다. 하지만 이 박사는 주경야독으로 책을 손에 놓지 않았다. 특히 어려운 조국의 동포들을 돕고 자신의 빈곤한 처지도 동시에 해결하는 그가 선택한 진로는 바로 의사가 되는 것. 그러나 식민지 청년에게는 제대로 자신의 꿈을 펼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침략전쟁에 몰두하던 일제의 징병영장이 날아든 것이다. 이 박사는 청천벽력같은 일제의 영장을 받아들고 고민에 빠졌다.

독립투사의 아들로 아버지가 평생을 바쳐 투쟁해 온 일제를 위해 전장에 나간다는 것도 안될 말이었지만, 한편으로 이대로 의사의 꿈을 접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 박사는 중국으로 망명을 결심하고 1939년 봄에 조국을 떠난다. 중국에서 힘겹게 생활하면서 망명 1년만에 중국 의사시험에 합격하고 당당히 의사의 길로 들어선다. 그가 처음 병원을 개설한 곳은 길림성 길림현으로, 조선의 독립을 위해 일하던 많은 애국지사들의 발길이 잦은 곳이었다. 병원에서 얻은 수입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지원했고, 동포들을 위해 교포소학교를 운영해 동포 자녀들에게 배움의 길을 제공, 민족혼을 불어넣었다.

특히 김림성에서 이 박사는 의술외에 평생 자신의 숙제로 생각하고 몰두해 온 한가지 사명을 품고 있었다. 그것은 당시 우리 역사에서 완전히 지워졌을 뿐 아니라 중국인들에게도 비밀로 전해져 오던 우리나라 상고사(上古史)의 비밀을 밝혀내는 것. 이 박사는 지난 2017년 작고하기 전까지도 연구를 위해 중국을 오가며 자료를 수집하고 이에 대한 국내외의 관심을 환기시키는 작업을 꾸준히 진행해 왔다. 그 결실의 하나가 바로 이 박사가 지난 1995년에 소설형식을 빌어 우리 상고사를 복원한 ‘송화강의 증언’이다.

논산=김흥준 기자 khj50096@cctoday.co.kr
 

▲ 故 이덕희 박사가 백제종합병원 이사장직을 수행할때 모습. 백제종합병원 제공
▲ 故 이덕희 박사가 백제종합병원 이사장직을 수행할때 모습. 백제종합병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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