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만든 ‘감옥’… 죄만 가둔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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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만든 ‘감옥’… 죄만 가둔 것은 아니었다
  • 충청투데이
  • 승인 2019년 06월 20일 16시 23분
  • 지면게재일 2019년 06월 21일 금요일
  •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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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평섭의 충청역사유람] 33 대전교도소
3·1운동 확산… 총독부 감옥 설치
1928년 ‘대전 형무소’로 개칭돼
안창호 등 독립운동가 다수 투옥
1961년 ‘대전교도소’로 재개칭
동백림 사건… 고암 이응노도 복역
北, 반공인사 집단 처형 아픔도…
▲ 대전형무소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들과 중범죄자들이 거쳐가는 그야 말로 우리 역사의 축소판이 됐다. 사진은 1973년 촬영한 대전교도소 전경. 대전찰칵 제공

[충청투데이 충청투데이] 1919년 5월 조선총독부는 총독부령 36호로 '대전 감옥' 설치를 결정하고 대전시 중촌동에 옥사를 마련했다. 그해는 3·1독립운동이 전국을 휩쓸고 있어 일제는 만세운동에 참여하다 검거된 애국지사들을 수용할 감옥이 시급해 졌던 것이다. 특히 대전 감옥을 '사상범'이라 하여 독립운동의 주동 자급을 수용할 특수 감옥으로 지정, 감옥 안에 또 하나의 감옥을 만들어 철저한 감시를 하게 했다.

일제는 1928년 '대전 감옥'을 '대전 형무소'로 개칭했는데 1961년 '대전교도소'로 이름을 바꾸기까지 존속되다가 도시의 팽창으로 인해 지금의 진잠으로 이전했다.

특히 우리의 쌀을 착취하던 일제는 쌀을 아끼기 위해 만주에서 콩을 많이 섞은 밥을 먹였는데 이때문에 교도소 가는 것을 지금도 '콩밥 먹으러 간다'는 말이 생긴 유래가 됐다.

이렇게 특별 사상범 수용소로 출발한 대전형무소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들과 중범죄자들이 거쳐가는 그야 말로 우리 역사의 축소판이 됐다. 대표적인 인물들을 꼽아 보면 우선 도산 안창호(安昌浩) 선생을 들 수 있다. 미국과 중국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던 그는 1932년 4월 20일 중국 상해에서 일경에 체포돼 징역 4년을 언도 받고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감옥 생활을 하면서도 인품이 흐트러지는 일이 없어 일본 간수들도 깍듯이 존댓말을 썼다고 한다. 그의 아들 안필립은 미국에서 영화배우로 활동을 했는데 1960년대 말 필자가 신문사에 있을 때 대전에 와서 대전교도소를 안내한 일이 있었다. 대전 대성고등학교 교장으로 있던 안창호 선생의 친척되는 안기석 씨도 동행했는데 선생이 갇혀 있던 감방에 꽃을 놓고 기도하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몽양 여운형 선생도 이곳에서 3년간 복역했다. 선생은 그 뛰어난 웅변 솜씨로 감옥에서도 쩌렁쩌렁한 연설을 토해 간수들을 당황하게 했다고 한다. 선생은 애석하게도 해방 후 1947년 7월 같은 동포의 손에 암살되는 불운을 겪었다.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을 역임하는 등 항일운동을 하던 김창숙 선생은 1927년 일경에 체포된 후 14년이라는 긴 세월을 대전형무소에서 보냈다. 해방 후 초대 성균관장을 역임했으나 이승만 대통령에 반대하다 다시 대전교도소에 수감되는 불운을 겪었다.

이승만 대통령 암살 미수로 수감된 김시현, 장면 부통령 암살 미수로 15년을 언도 받은 최훈, 김구선생 암살범 안두희 등도 이곳에서 수형생활을 했다. 안두희는 수감중에 6·25전쟁이 터져 형집행정지로 석방됐으나 한평생 국민들의 원성 속에 살아야 했다. 전남도시사와 국회 부의장을 지냈던 서민호 씨는 1952년 전남 순천에 출장갔다가 음식점에서 육군 장교와 시비 끝에 권총을 발사해 죽게 한 죄로 대전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했다.

대전에 '이응노 미술관'을 탄생시킨 고암 이응노 화백 역시 이곳에서 복역을 했다. 유신정권 때 소위 '동백림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이응노 화백은 교도소의 배려로 그림을 그릴 수 있었고 그때 그린 그림이 유럽에서 바람을 일으켰다. 특히 그는 교도소에서 식사 때 밥풀을 모아 '밥 조각'을 만들었는데 이 역시 유럽에서 전시돼 화제가 됐다.

1968년 통혁단사건으로 무기징역을 받은 신영복 교수도 이곳에서 복역을 했고, 출소 후 '감옥으로 부터의 사색', '담론' 등 저서들을 남겼다.

무엇보다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할 것은 1950년 6·25때 북한군이 후퇴하면서 이곳에 수용돼 있던 반공인사 6832명을 잔혹하게 처형한 것이다. 우물에 던져지고, 참호 속에 생매장하고… 이곳에서 억울하게 죽어 간 영령들의 명복을 빈다.

<전 세종시 정무부시장·충남역사문화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