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픽]나라 잃은 슬픔을 달래던 그 길 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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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데이픽]나라 잃은 슬픔을 달래던 그 길 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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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년 06월 15일 09시 30분
  • 지면게재일 2019년 06월 15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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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의 상징 백범…그의 한 서린 마곡사
마곡사에서 스님이 된 김구 선생, 日중위 제거한 김구 사형 선고
1898년 탈출후 마곡사에 은신해 승려생활… 삭발했던 바위 아직도 그대로

날씨도 바람도 좋은 6월이다. 호국보훈의 달인 6월하면 떠오는 곳이 공주 마곡사 ‘솔바람 길’이다.

2017년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솔바람 길'을 6월 걷기 여행길로 선정하기도 했다.

6월 걷기 좋은 여행길에 솔바람 길이 선정된 이유가 있다.

충청투데이DB

이곳은 백범 김구선생이 젊은 시절 승려가 돼 은신생활을 할 때 이 길을 산책하며 우국(憂國)의 한을 달랬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세에 이 길을 '백범 명상의 길'이라고 명명했다. 특히 연초록으로 뒤덮이는 6월의 마곡사 계곡을 끼고 솔바람을 마시며 걷노라면 어떤 번민도 고뇌도 맑게 침전되는 것을 느낀다.

김구선생은 21세 한창 피가 끓는 나이에 고향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 나루에서 거들먹대는 일본 육군 중위 쓰치다를 맨손으로 때려죽인 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인천형무소에서 복역을 한다.

그럼 그는 왜 쓰치다 중위를 살해했을까?

김구선생은 18세 때 과거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방한다. 시험은 형식적이었고 권세가의 아들이거나 돈으로 매수한 사람만이 합격이 되는 것을 보고 그는 크게 실망을 한다. 나라의 기강이 뿌리에서부터 썩어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1895년 10월 8일 일본 공사의 사주를 받은 낭인들이 궁궐에 침입, 명성황후를 무참히 시해하고 시신을 불태운 '을미사변'이 발생하자 그는 일본에 대한 적개심에 불탔다.

압록강을 건너가 의병단과 함께 일본군 토벌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나루터에서 일본군 쓰치다 중위와 부딪히자 맨주먹으로 때려눕힌 것이다. 그만큼 몸집이 장대하고 힘도 넘쳤다.

김구선생은 1897년 사형이 선고돼 집행 직전에 고종임금의 특사가 내려져 집행이 정지되었다. 그런데도 그는 석방되지 않자 이듬해 탈출을 하고 만다.

사진=솔바람길
사진=솔바람길

김구가 탈옥하자 전국에 경계망이 퍼졌고 몸집이 장대해 어디 은신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전라도, 경상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마침내 마곡사가 몸을 숨기기에 적합하다고 판단해 1898년 2월 이곳으로 숨어들었다.

마곡사에서는 김구선생을 따뜻이 맞이했고 본전과는 약간 거리가 있는 거처에 머물게 했다. 그리고 김구선생은 마곡사 하은 스님에게서 계를 받고 스님이 됐다. 법명은 원종(圓宗).

'백범 명상의 길' 약 200m쯤 되는 계곡 언덕의 바위는 지금도 스님이 되기 위해 삭발을 하던 자리가 보존돼 있다. 그래서 이곳을 지나노라면 그때 삭발하는 백범의 모습이 아른거리는 것만 같다. 김구선생 자신도 그의 자서전 '백범일지'에서 삭발을 할 때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시간이 가면서 신분노출의 위험이 커지자 8개월쯤 있다가 평양 인근에 있는 절로 옮겨 중국 상해로 갈 때까지 은신생활을 했다.

일제하에서 항일투쟁과 독립운동의 상징처럼 되어 있는 백범 김구선생. 1946년 8월 13일 해방 이듬해 그는 승려생활을 했던 마곡사를 못 잊어 후에 부통령이 된 이시영과 함께 이곳을 찾았다. 그리고 인근의 주요 인사들을 초청해 간담회를 갖기도 했다.

특히 이때 마곡사 방문 기념으로 향나무 한 그루를 심었는데 73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푸른 모습으로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그의 마지막 모습이 되고 말았다. 1949년 6월 26일 경고장에서 안두희가 쏜 총을 맞고 안타깝게도 숨을 거뒀다. 마곡사는 그를 기려 해마다 제사를 올리고 있고 '백범 명상의 길'은 오늘도 이곳을 걷는 이에게 백범의 애국심을 생각게 한다.

<변평섭의 충청역사유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