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꽤 오랜 세월 '군관민(軍官民)'이라는 표현이 아무 저항감 없이 통용된 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가당치도 않게 순서를 매긴 용어가 자연스럽게 쓰여진 바탕에는 군사정권의 억압과 사회의 무력감이 깔려있었을 것이다.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의미 깊은 사회발전의 징표를 이런 데서 찾아본다.

보훈처(報勳處)라는 정부기관 명칭을 쓰기까지 원호처(援護處)라는 권위적이고 일방적인 시혜의 어감을 풍기는 용어를 오래 사용해야 했다. 나라를 위해 희생하고 고초를 겪은 분들께 국가가 해야 할 응당의 보답을 '원호'라는 다소 건방져 보이는 명칭으로 제대로 펼칠 수 있었을까. 1985년부터 국가보훈처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장관급 처장이 맡고 있는 이 부서를 가능하다면 '보훈부'로 승격했으면 한다. 개인주의가 점차 두터워지고 나와 가족의 안위, 행복을 최우선시하는 세상에서 보훈대상자들에 대한 국가, 사회의 보답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의 경우를 생각해본다. 프랑스 파리 중심부 '팡테옹', 그리스 신전 형태의 이 건물은 국가를 위해 산화한 분들이나 불멸의 업적과 공헌을 남긴 위인들을 모시는 국가최고등급의 국립묘지인 셈이다. "위대한 사람들이여, 국가는 그대들께 감사한다"라는 큼지막한 글씨가 새겨진 정면 기둥 위 현판이 이 나라의 보훈의식을 요약한다.

지난달 아프리카에서 인질구출작전 중 목숨을 잃은 프랑스 군인 두 명의 장례 모습은 특히 인상적이었다<사진·연합뉴스>. '앵발리드'라는 군사박물관 뜰에서 치러진 영결식은 간결, 소박하면서도 국가가 영웅들에게 행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우와 존경을 함축해 보여주었다. 우리가 흔히 봐온 높다란 제단에 걸린 플래카드, 뒤덮인 흰 국화, 각계의 조화와 향불, 내빈들이 착용한 흰 장갑과 검정리본, 그 어느 것도 볼 수 없었다. 식장 한 복판에 국기로 감싼 유해가 놓이고 대통령이 국가최고훈장 레지옹 도뇌르를 추서하면서 관을 어루만지고 한동안 묵념을 올린다. 추모객들은 '집에서 멀리'라는 노래를 함께 부르며 아프리카에서 숨진 두 용사의 명복을 비는 단출하지만 절제된 예식이 주는 인상과 감동은 강렬했다. 높아진 우리의 국격에 걸맞게 보훈에 대한 새로운 의식 정립과 표현방식에 대한 열린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한남대 프랑스어문학전공 명예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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