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평섭의 충청역사유람] 31 관찰사 집무하던 '선화당'
조선시대 충청도 관찰사 377명
애초엔 충남·북, 평택까지 관할
선화당, 현 공주사대부고 자리에
일제때 이전… 현 충남역사박물관
관찰사 권한 막강… 부정부패도↑
마지막 관찰사는 친일파 최정덕
첫 출근날부터 흉흉한 일로 시작

▲ 조선 왕조가 개국을 하고 1910년 일제 식민지로 나라가 망할 때까지 충청도 관찰사들이 집무를 보던 관청 청사가 충남 공주시 웅진동에 있는 '선화당(宣化堂·충남 유형문화재 92호)’이다. 문화재청 제공
▲ 충청남도유형문화재 제92호 ‘선화당 종단면도’. 문화재청 제공

조선 왕조가 개국을 하고 1910년 일제 식민지로 나라가 망할 때까지 충청도를 다스린 관찰사는 모두 377명에 달한다. 사육신(死六臣)의 한 분이었던 박팽년, 그리고 같은 집현전 학자였지만 세조 편에 섰던 정인지, 인조반정 때의 이경흥, 조선이 망할 무렵 우의정과 영의정에 까지 올랐던 심순택, 대한제국 외부대신으로 '을사5적'으로 지탄 받은 박제순(朴齊純) 등등 충청도 관찰사를 역임한 인물들이 참으로 많다.

이런 인물들이 집무를 보던 관청 청사가 충남 공주시 웅진동에 있는 '선화당(宣化堂·충남 유형문화재 92호)’이다. 충청도 관할지역은 지금의 충남·북은 물론 경기도 평택까지도 포함하고 있어 그 세가 대단했다.

그러다 1896년 8월4일 조선 8도를 13개 도로 나누면서 충북이 분리해 나갔고, 얼마 후 평택도 경기도에 편입되어 금산군을 제외한 현재의 충남 지역을 관할하게 됐다.

1598년 공주에 터를 잡은 선화당은 1646년 큰 홍수에 떠내려가는 수난도 겪었으며 한일합방이 될 때까지 지금의 공주사대부속고등학교 터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러다 식민지 시대 공주읍 중동으로 옮겨져 공주박물관으로 변신을 했고, 다시 지금의 웅진동으로 이전해 '충남역사박물관'으로 충남의 모든 역사적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다. 참으로 이 나라가 겪은 국난과 함께한 '선화당'의 운명이라 하겠다.

여기에 전시되고 있는 사료 중에는 관찰사가 지방 군수나 현감의 근무 성적을 기록한 문서도 있다. 관찰사는 관할 지역을 순찰한 결과를 上·中·下로 성적을 작성했는데 下를 맞으면 즉시 해임됐고 中이라 해도 2회에 걸쳐 中이 나오면 역시 해임이었다.

그러니 관찰사의 권한이 막강했으며 '관찰사'라는 이름 자체가 그런 임수를 지니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면 군수들의 전수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첫째가 그 지역에 효자, 효부가 얼마나 있는가 였으며 살인사건 등 강력사건이 많으면 감점이었다. 둘째는 과거시험이나 진사시험 등에 얼마나 합격자를 내었는지도 중요한 점수가 되었으며 특이한 것은 그 고을에 어린이 출산율과 전염병 피해 등 요즘의 보건복지행정 못지 않는 것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점수를 맞아도 농사를 망치면 회복불능의 불이익을 받는다.

이렇게 막강하고 권력을 가진 관찰사였기에 조선 말기 부정부패도 극심했을 것이다. 지방관속들은 관찰사에게 높은 점수를 얻고 자리를 보존하기 위해 많은 뇌물을 바쳤고,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 백성들을 괴롭혔으니 말이다. 더욱 관찰사는 행정 뿐 아니라 사법권과 병권까지 가지고 있어 관찰사의 행차는 그 규모의 위세가 대단했다. 대한제국 최후의 관찰사는 친일파의 거물 최정덕(崔廷德). 그가 마지막 관찰사가 되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지만 그가 공주에 있는 '선화당'에 첫 출근을 하는 날 불길한 사건이 벌어 졌다.

선화당 뒤뜰에 있는 모과나무에 이곳 기생이 목을 매어 자살한 것이다. 공주지역에서는 그 기생이 전임 관찰사의 애첩이었는데 관찰사가 한양으로 떠나버리자 목숨을 끊었다는 이야기와 당시 공주에 와 있던 일본인 전기기사와 헤어지게 되자 그랬다는 등 이런 저런 이야기 퍼졌고 그 불길한 일이 있은 후 한일합방이 되어 최정덕 관찰사 역시 마지막 관찰사로 공주를 떠났다.

<전 세종시 정무부시장·충남역사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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