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주형 을지대학교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

계절도 바뀌고 공기도 한층 깨끗한 틈을 타서 평소 마음먹었던 대청소를 하기로 했다. 옷 정리는 아내에게 맡기고 필자는 집안 구석구석 청소를 끝낸 뒤 아이들의 놀이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베란다로 향했다. 베란다 일부를 비교적 사용이 드문 물품들을 보관하는 창고 공간으로 우선 구분하고 나머지 공간을 놀이 공간으로 활용하기로 했다.

먼저 오랜 시간 방치해둔 베란다 바닥의 먼지들을 물걸레로 반복해서 닦은 후 종류별로 정리한 장난감 보관함을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적절히 배치했다. 손걸레로 보관함을 일일이 닦는 작업에는 많은 수고와 시간이 필요했다. 다음은 창고 공간 구성 작업이었다. 아이들이 어릴 때 즐겨 놀던 미끄럼틀, 층간 소음 방지용 매트, 공간만 차지하던 거실 의자, 그리고 부피가 큰 장난감 세트 등을 그 공간으로 밀어 넣었다. 약간의 여유 공간은 다른 물품들을 위해 남겨두었다. 어느 정도 마무리 되었을 땐 필자의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로부터 한 시간 정도 지났을까. 베란다에서 '쿵쿵', '우당탕탕', 그리고 깔깔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놀이 공간에서 나는 소리라 여겼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무언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베란다로 향했다. 그런데 놀이 공간에는 아이들이 없었다. 불안한 마음으로 옆 창고 공간으로 들어섰다. 아니나 다를까, 한 시간 전의 창고 공간의 모습은 온데 간데 사라지고 없었다. 그 대신 푹신한 매트로 제작된 거대한 매트미끄럼틀이 그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소파는 방방이 되어 있었고, 한쪽 구석에 두었던 팔 받침은 방방을 위한 막내 아이의 디딤발이 되어주고 있었다. 박스에 정리해둔 책들은 이리저리 나뒹굴며 남겨둔 여유 공간마저 잠식해 버렸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아이들의 발바닥에 묻은 먼지들은 힘들게 닦아 놓은 바닥을 수놓고 있었다.

땀에 흠뻑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하고 발갛게 상기된 얼굴을 한 아이들은 망연자실한 필자를 잠시 봤을 뿐 여전히 그 즐거움을 누리고 있었다. 마치 자랑이라도 하듯. 그런 광경 앞에서 필자는 차마 속마음을 드러낼 수 없었다. 오히려 모처럼의 자유를 만끽하는 모습 앞에 그동안 보살피지 못한 미안함이 찾아왔다. 그래 마음껏 놀아라, 물 만난 물고기들에게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한가. 그러나 잠시 후 매트미끄럼틀 위로 이불을 가져가려는 큰 아이의 시도는 필사적으로 막아야 했다. 왜냐하면 하나하나 털어서 정리해 놓은 두꺼운 겨울 이불을 다시 작업해야 한다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났기 때문이었다.

참 이상했다. 왜 아이들은 멋지게 정리해 놓은 놀이 공간이 아니라 창고 공간에 더 관심이 갔을까. 놀이 공간은 보기도 좋았고 깔끔했다. 장난감도 키와 눈높이를 고려해 손닿기 쉬운 위치에 두기까지 하는 세심함도 갖췄다. 여유 공간도 더 넓었고, 거실 가까이에 있어 오가기도 편했다. 반면 창고 공간은 상대적으로 좁았고 대충 정리를 했기에 볼품도 없었다. 창고 공간으로 가려면 놀이 공간을 지나쳐야 했기에 아이들이 당연히 놀이 공간에서 발걸음이 멈출 것이라 여겼다. 그런 필자의 생각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아이들의 작품 앞에 여지없이 무너졌다. 볼품없던 창고 공간이 아이들의 창조적 놀이 공간으로 탈바꿈 되리라 어찌 상상할 수 있단 말인가.

지난 어린이날 자신의 아이를 위해 어떤 장난감을 선물하는 것이 좋겠냐는 질문에 사주고 싶은 선물이 혹시 있냐고 바꾸어 질문한 적이 있다. 일곱 살이 되었으니까 자전거를 사주려고 한다는 대답을 듣고 난 후 필자는 아이를 장난감 가게에 데리고 가서 아이가 사달라고 하는 것을 사주면 어떻겠냐고 말했다. 일곱 살은 자전거라는 등식은 존재하지 않기에 보이는 것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일 지를 그 아이에게 맡겨 두어야 하지 않겠냐는 뜻이었다. 부모가 보기에 아이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고 그들의 미래를 위해 최선일 수 있다고 여기며 행해지는 조치들이 다르게 보고, 느끼며, 상상할 수 있는 창의적인 아이로 성장하는데 걸림돌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 본다. 대청소 때문에 좋은 가르침을 얻은 것 같아 아이들에게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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