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미란 충북무심수필문학회 사무처장

밤안개가 자욱한 해변 길을 달린다. 바닷물을 적시고 나온 파르스름한 보름달이 하늘에 반쯤 걸려 있는 늦은 밤이다. 가족과 함께 서해바다 신두리 해안을 찾았다. 갯벌의 가장자리에서 치맛자락처럼 나풀거리는 파도가 희뿌옇게 다가온다. 잔잔한 고요함이 밀려온다. 양팔을 벌려 본다. 겨울 한기에 서린 해안 바닷가가 내 품에 꼭 맞게 안긴다. 들릴 듯 말 듯 파도 소리는 엄마가 불러 주시던 자장가처럼 그리움의 속삭임으로 귓전을 파고든다. 한없이 바다를 바라본다. 리조트 끝자락을 돌아 바닷가로 향했다. 그곳에는 교교(皎皎)한 달빛을 받은 모래 언덕의 서늘한 풍광이 펼쳐져 있었다.

바닷가 모래언덕, 사구(砂丘)는 세찬 바람과 바닷물에 의해 오랜 세월 모래가 쌓여 언덕을 만들었다. 끝이 가물가물한 모래언덕이 눈앞에 펼쳐졌다. 한 편의 명화다. 하늘에는 은색 달이 떠 있고, 달빛에 젖은 바다는 하얀 파도로 부서지고 있다. 희끗희끗한 너른 모래언덕은 가무스레하게 끝이 스러지고 있다. 중천으로 오르는 달도, 바닷가로 밀려오는 파도도, 모래언덕 위로 부는 바람조차 소리가 없다. 정중동(靜中動)이다. 푸른 하늘과 맞닿은 모래언덕과 갈대 숲, 야트막한 산자락 곳곳에 조붓한 산책로로 마음 끌리는 대로 밤길을 걷다보니, 그 가운데에서 세파를 떠나온 망중한(忙中閑)을 느껴본다.

그곳엔 내 숨결조차 들리지 않는 적막함만 있을 뿐이다. 서해 바다 바람만 쉴 새 없이 내 앞전을 한발 앞서 지나 갈 뿐 아무것도 없다. 눈이 시리도록 애잔한 바다를 끼고 해변 길을 따라 걷는다. 지금껏 사구는 끊임없이 자연과 어울리며 다양하고 특이한 환경을 만들어 왔다. 갯그령 사초 바람, 갯메꽃 등 희귀한 사구의 식물이 바람에 날려 온 씨앗을 척박한 모래땅에 깊이 뿌리를 내렸다. 사구는 그들을 태풍에 견디게 했고 함박눈을 멈추게 하며 봄눈이 올 때까지 지켜줬다. 그래서 희귀한 사구식물은 척박한 환경을 탓하지 않고 모래 속에 기어코 뿌리를 내려놓았다.

모래의 흐트러짐을 붙잡아 사구의 언덕을 유지하게 도우기 위해서였다. 모래는 꽃에, 꽃은 모래에 희망이요 어울림이었던 것이다. 잎은 바람에 날려 오는 모래를 걸리게 해 모래언덕에 머물게 한다. 그 모래언덕에서 꽃이라고 하는 생명은 참으로 위대한 신비로움을 만들어낸 것이다.

사구는 모래 저장고요 자연 방파제이기도 하다. 평상시에 건조한 모래가 바람에 날려 사구에 쌓이면 저장해 두었다가 폭풍해일에 바닷가 모래가 쓸려나가면 사구의 모래는 이동하여 해안을 깎이지 않도록 도운다. 또한 사구는 육지와 바다 사이에서 바람으로부터 농토를 보호하고 바닷물의 유입을 자연스럽게 막는 방파제다. 서로를 상처 내며 보듬고 살기에 각박한 우리의 삶과는 사뭇 다르지 않는가. 서로가 자신을 내어주며 공생과 공존하였기에 신두리 해안을 유지 시키고 있는 것이리라.

모래언덕은 서해를 건너온 매서운 바닷바람과 세찬 파도가 밀려와도 흔들림 없이 자신의 자태를 만들어 내고 있다. 태고의 정적만 맴돌 뿐 자신이 쌓은 공덕을 결코 자랑하지 않는다. 모래, 파도, 자연이 만들어 내는 아름다운 하모니가 내 공허한 마음을 달래준다. 그 속엔 무수한 시간이 만든 침묵의 미덕이 있고, 움직임 없이 관조하는 인고가 서려 있어 더욱더 그러하다.

사구는 더불어 사는 지혜를 우리에게 전해 준다. 사구는 서로 보듬고 아우르고 배려하는 공생 공존의 삶을 살라 강한 메시지로 울려 퍼져 온다.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아름다운 또 하나의 삶이다. 더불어 사는 마음의 부재인 세상이다. 반목과 질시를 멈추고 화해와 상생의 삶이 절실한 세상이다. 갈등을 넘어 사랑과 평화의 샘이 흐르는 세상이 지친 삶에 힘을 더하는 한 줄기 희망의 빛이리라.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날, 나는 다시 신두리 바닷가 모래언덕을 찾으리라. 마음이 옹색할 때, 타인보다 내가 더 커 보일 때, 사랑과 믿음의 덕을 쌓으러 이곳 바닷가 모래언덕을 다시 찾으리라.

저작권자 © 충청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