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평섭의 충청역사유람] 30 제천의 義林池
국내 最古… 축조방법도 놀라워
신라시대 ‘악성’ 우륵과도 밀접
조선시대 학자 정인지가 확장
용 승천 위한 수량 확보 의견

▲ 충북 제천시에 있는 의림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아름다운 저수지이다. 특히 이곳은 신라시대의 악성으로 유명한 우륵, 세종대왕 때의 집현전 학자요 충청도 관찰사와 정승을 지낸 정인지 등과 연관이 깊다. 제천시 제공
▲ 우륵정
▲ 우륵샘

[충청투데이] 충북 제천시에 있는 의림지(義林池)를 이 시리즈에 특별히 소개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아름다운 저수지라는 것이고, 둘째는 제방을 쌓은 방법과 기술이 현대과학으로도 놀랄 만큼 뛰어나며, 셋째는 이 의림지와 관련된 인물들 예컨대 신라 진흥왕과 그 시대의 악성으로 너무나 유명한 우륵, 그리고 세종대왕 때의 집현전 학자요 충청도 관찰사와 정승을 지낸 정인지 등과 연관이 깊기 때문이다.

이처럼 유서 깊은 의림지는 언제 만들어 졌을까? 여러 설이 있는데 특히 악성 우륵이 이곳에 흐르는 냇물을 막고 둑을 쌓은 것이라는 설이 시선을 끈다.

우륵은 원래 지금의 김해 지방을 중심으로 번성했던 가야국 사람이었다. 그는 1500여년 전인 490년 가야국의 가실왕과 함께 가야금을 제작 12곡을 만들어 널리 보급했다. 가야금의 위가 둥근 것은 하늘이요 아래의 평평함은 땅을, 그리고 소리를 내는 12줄은 1년 12개월을 뜻하는 것으로 가야국의 평화와 번영을 기원함을 뜻한다.

그러나 우륵은 가야국의 정치적 상황에 어쩔 수 없이 신라로 망명해 지금의 충북 의림지 인근에 기거하며 가야금을 뜯고 켜는 것으로 세월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신라 진흥왕이 이곳에 왔다가 우륵의 가야금 연주에 크게 감동해 그것을 신라의 음악으로 받아들였다. 우륵의 신분이 크게 올라갔음은 물론이고 의림지를 만들었다면 이때였을 것이다.

우륵은 경치가 아름다운 이곳에 가야금 연주의 분위기를 높이기 위해 기왕에 있던 저수지를 크게 확대했는지 모른다. 지금도 이곳에는 우륵이 살았다는 돌봉재가 의림지 동쪽에 있고 또한 우륵당(于勒堂)의 옛터라던지 우륵이 식수로 사용했다는 샘, 우륵정이 있으며 우륵이 가야금을 켰다는 탄금대와 제비바위 전설이 전해 오고 있으니 의림지는 그와는 떼어 놓을 수 없다.

어쨌든 의림지는 호남의 김제 벽골제와 함께 삼한시대 축조되었음은 삼국사기나 여러 기록에 나타나 있는바 최소 1500년은 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최고의 저수지다. 또 확실한 기록은 세종 때 집현전 학자론 유명했던 정인지(鄭麟趾)가 충청도 관찰사 시절 이곳을 둘러보고 충분한 농업용수를 확보하기 위해 의림지를 크게 축조했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많은 인력이 필요했을 텐데 어떻게 그 인원을 확보했을까? 여기에 전해 오는 구전으로는 그가 충청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단종 복위를 위해 거사하려던 세력을 막기 위해 충청과 영남에서 차출된 병사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동원했다는 것.

그런데 최근 풍수지리에 밝은 한 인사는 의림지를 확충한 것은 농업용수 확보 뿐 아니라 이곳 의림지의 용이 승천하기에는 물이 더 많이 필요했기 때문이 아니냐는 개인적 견해를 밝혔다. 오히려 용(龍)에 관해 액센트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의림지를 내려다보고 있는 해발 874m의 용두산(龍頭山)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의림지 인근의 지역에서 신라의 김유신, 고종의 밀사로 헤이그에 갔던 이종설, 조선시대의 임경업 장군, 임진왜란 당시의 명장 신립 장군, 최근의 반기문 전 UN사무총장 등 수없이 많은 정치가, 학자, 예술가들이 배출된 것도 우연은 아닌 것 같다.

의림지에 대해 요즘의 과학자들도 놀라는 것은 진흙과 모래, 소나무 낙엽을 번갈아 다진 후 다시 굵은 자갈과 모래, 흙으로 축조했는데 특히 점토층을 불에 태워 제방의 방수와 강도를 높였다는 사실이다. 참으론 의림지는 우리 충청의 보석 같은 존재다.

<전 세종시 정무부시장·충남역사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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