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구 가톨릭대학교 대전성모병원 외과 교수

진료 환경도 시대에 따라 많이 달라진다. 나는 의사가 된 후 20년이 조금 넘게 지났다. 경험을 이야기하기에는 그 기간이 충분하지 않을지라도 처음 의사생활을 시작하던 때와는 진료현장의 풍경이 많이 변했다.

소위 동의서라고 하는 부분도 그 중 하나다. 결론을 말하면 예전과 비교해서 환자에게 설명과 동의서를 받는 상황이 대단히 많아졌다는 점이다. 환자의 알권리 확보와 자기 결정의 권리를 보호하려는 시대의 흐름에 꼭 필요한 일이기는 하지만, 설명과 동의를 받아야 하는 의료진도 설명을 듣고 동의서에 서명을 해야 하는 환자나 보호자도 나름 귀찮은 일이 많아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대부분 병원 생활의 시작은 동의서를 작성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신체에 위해를 가하는 침습적인 의료행위에는 거의 모든 경우에 설명 후 의료진이 동의서를 받는다. 수술하는 경우가 가장 대표적이다. 물론 나는 법률가가 아니며, 여기에서 동의서의 법적인 부분을 강조해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한 번은 위암 수술에 대한 동의서를 유심히 본 적이 있다. 여전히 일반인이 이해하기에는 어렵고, 설명하는 부분의 상당 부분이 수술 그 자체보다는 사망 등을 포함한 합병증 등에 대한 부분이 훨씬 중요하게 강조되고 있다. 이 설명을 듣고 과연 환자가 자발적으로 수술을 받는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적이 있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는 것이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사실 동의서가 많아지고, 복잡해진 것의 배경에는 의료의 서비스 자체가 복잡해지고, 많아진 측면보다는 분쟁의 소지가 있을 경우 불필요한 양측의 오해를 해결하려는 부분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설명을 했고, 이에 대해 환자가 동의했다는 증거를 남기려는 것이다. 실제로 의료 분쟁의 상당 부분은 의사의 설명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것이며, 이러한 의료진의 설명에 대한 불만족에 대한 소송 및 의료 분쟁이 해마다 증가하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시술 관련 동의서는 해당 의료 행위에 대한 충분한 의사의 설명과 그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그러한 의료 행위를 환자가 허락하는 절차이다. 중요한 지점은 '충분한 설명과 이해'라는 부분일 것이다. 유쾌하지 못한 의학적 상황을 쉽게 설명하고, 또 전문지식이 없는 환자나 보호자가 얼마나 잘 이해하는지가 훨씬 의미 있는 부분이라는 점이다. 무수히 많은 합병증을 나열된 설명지의 친필 서명이 동의서의 목표는 아닐 것이다.

80이 훨씬 할아버지가 위를 절제하는 수술이 필요하다. 가족이라고는 동년배의 할머니가 전부이다. 장황하게 이런 저런 설명을 한다. 주로 합병증 등 바람직하지 않을 상황을 더욱 강조하여 이야기한다. 언뜻 보아도 이 두 노년은 나의 이야기를 이해한 것이 아니다. 결국 '여기에 서명 하셔야 수술을 합니다'라고 말하는 이런 상황이 조금은 불편하다. '의사 선생님만 믿습니다. 다 알아서 해 주세요'라고 말할 때는 더욱 그렇다. 과연 이 동의서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환자와의 관계에 대한 신뢰보다는 합의의 증거를 중시하는 세상이 가끔은 매정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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