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하윤 배재대 주시경교양대학 교수

후한(後漢)의 양진은 청렴결백한 관리이다. 일전에 동래 태수로 있을 때 왕밀이란 자를 천거한 일이 있었는데, 그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밤중에 금 열 근을 가지고 양진을 찾아왔다. 금을 바치면서 지금은 한밤중이라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으니 안심하고 받으라 한다. 그러자 양진은 하늘이 알고(天知) 땅이 알고(地知) 그대가 알고(爾知) 내가 아는데(我知) 어찌 아무도 모른다고 하냐며 거절한다. 당황한 왕밀은 자신의 행동을 부끄럽게 여기며 돌아간다. 밤이 깊어서 아무도 모른다는 의미의 '모야무지(暮夜無知)'와 '양진사지(楊震四知)'라는 고사로 ‘후한서’에 나오는 이야기다.

인간에게는 두 가지 모습이 존재한다. 남과 함께 있는 나와 혼자 있는 내가 그것이다. 전자는 타인과 함께 하므로 언행을 삼가면서 '최소한의 양심(良心)'이 발동한다면, 후자는 방자한 태도로 삼갈 것이 없다고 치부하며 '최대한의 사심(邪心)'이 발동하는 것이다. 양심과 사심의 발동이 오직 타인의 유무에 따라 달라지면서 이러한 언동들은 유독 홀로 있을 때에 더 잘 드러나게 된다. 자신에게 부끄러워하지 않으니 스스로를 속이는 것에 거리낌이 없게 되고, 결국 자기(自欺)의 최종 결정자는 자기(自己)가 되고 마는 것이다.

홀로 있을 때 더욱 삼간다는 것, 신독(愼獨)은 자기의 그림자와 잠자는 이불에게도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자신이 행동하는 기준은 남이 보고 안 보고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지켜나가는 것(修身)에 있다는 것이다. 무자기(毋自欺) 또한 신독과 불가분의 관계다. ‘대학’은 자신을 속이지 않는다는 것은 악취를 싫어하고 미인을 좋아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 또한 혼자 있을 때는 좋지 못한 일을 서슴지 않고 행하면서 타인을 보면 슬그머니 자신의 좋지 못한 행위를 감추며 좋은 면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 소인들의 행태라고도 지적한다. 자신을 속이는 것이 예부터도 자경(自警)의 대상으로 여겨졌는지 무자기(毋自欺)는 오래전부터 우리 선조들이 좌우명으로 이어져 왔다. 16세기 퇴계 이황과 사계 김장생을 거쳐 20세기 성철스님과 백범 김구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만큼 인물 또한 다양하다.

무자기와 신독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가짐은 자신에게 성실해야 한다. 스스로가 성실한 자세를 견지하면서 자신을 가장 어려운 존재로 여겨야만 한다는 것이다. 우리 마음속에는 욕망과 욕정을 일으키는 '욕(慾)'이 내재해 있다. 이 '욕'이 사심의 발동을 조장해 양심을 흐리게 하는데, 중요한 것은 이것에 양심이 가려지지 않도록 자신의 마음을 신중하게 지켜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어려워해야 남의 마음도 어려운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자신의 양심을 속이지 말아야 타인의 양심 또한 지켜줄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무자기와 신독은 지금 시대에도 우리에게 주어진 현재진행형의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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