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픽]백제 오천결사대 충정이 깃든 황산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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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데이픽]백제 오천결사대 충정이 깃든 황산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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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년 05월 25일 09시 10분
  • 지면게재일 2019년 05월 25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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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백장군, 부여 천등산 자락서 출생, 5만 신라군에 맞선 백제 오천결사대
우세한 전술과 결의로 대등한 싸움… 비극의 씨앗 된 화랑 관창의 죽음

우리나라 역사에서 손꼽히는 전투로 기억되는 황산벌 전투.

660년 백제군과 신라군이 벌인 황산벌 전투는 지금의 논산 연산 지방이 주요 전투 무대다.

이 전투가 유명한 것은 백제 5000명의 군사가 5만명에 이르는 신라의 대군을 상대로 치열한 싸움을 벌인 것도 있지만, 당시 백제 계백 장군이 처자식을 죽이고 전투에 나갔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그러나 계백 장군이 처자식을 죽인 행동을 두고 여러 비판도 있다.

천륜을 어겼을 뿐 아니라 그가 처자식을 칼로 베고 전장에 나가는 모습에 오히려 군사들은 이기는 싸움이 아니고 지는 싸움이라는 인식을 하게 돼 사기가 떨어졌을 것이라는 의문도 있다.

충청투데이 DB

정말 그랬을까? 계백장군은 지금 부여군 충화면 천당리 천등산 자락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도 이곳에는 계백이 활을 쏘며 말을 달리던 곳이라며 전해지는 장소도 있다.

그는 의자왕의 신임이 두터웠기 때문에 오만의 신라군이 탄현을 넘어 침공해 오자 5000명의 군사를 주어 막게 했다.

서해를 건너 쳐들어오는 당나라 소정방의 군사를 막기 위해 2만명이 넘는 대군을 의직에 맡겨 출동시켰기 때문에 계백장군에게는 5000명의 군사가 주어 졌다. 이것을 역사는 오천 결사대로 부른다.

5만의 신라군에 비해 10분의 1에 불과한 5000명으로 어떻게 싸우라는 것인가?

계백은 이미 전세는 기울어 진 전투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뜨겁게 불탔던 계백은 오천 결사대를 이끌고 전장으로 달려가기 앞서 적에게 잡혀 노예가 되는 수모를 겪게 될 가족을 그렇게 정리하지 않았을까? 그때의 상황, 그 시대적 배경이 그런 선택을 안겼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백제사 연구로 널리 알려진 한국전통문화대학 이도학 교수는 이와 같이 주장하면서 이런 계백의 뜨거운 결의 때문에 황산벌 전투에 5만이나 되는 군사를 갖고도 신라 김유신이 쉽게 백제군을 제압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황산벌은 지금 논산시 연산면 신량리 일대로 알려져 있다. 계백 장군은 이곳을 선점하기 위해 숨가쁘게 달려 왔다. 그리고 세 진영으로 나누어 황령산성, 산직리산성, 노촌리산성에 각각 부대를 배치, 신라군을 노렸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신라군이 구름떼 같이 몰려들었으나 우세한 전술과 지형지세에 신라군은 한 발짝도 전진을 못하고 퇴각했다.

이도학 교수는 이것만 보아도 계백장군이 충성심 뿐 아니라 전략가로서 매우 뛰어 났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했다.

이처럼 신라군은 4차례나 백제군을 총공격을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계백장군의 오천 결사대가 5만 신라군을 격퇴 시키는 승리를 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때 뜻밖의 상황이 발생했다. 신라군의 화랑 관창이 단신 말을 달려 백제군 진영으로 돌격하다 붙잡힌 것이다. 계백이 관창의 투구를 벗겨 보니 16세의 어린 소년.

계백은 그를 가상히 여겨 죽이지 않고 돌려보내는 덕을 베풀었다.

그러나 관장이 또다시 진영으로 뛰어 들자 그를 붙잡아 목을 베어 신라 진영으로 돌려 보냈는데 이것이 신라군에게 폭발력을 일으켜 버티고 버티던 황산벌이 신라군의 수중에 들어 갔고 오천 결사대는 거의 전멸하고 말았다.

몰론 계백도 죽었고 700년 이어온 백제 역시 비참하게 막을 내렸다. 천년 세월이 스쳐간 황산벌, 진정 그 때의 영웅은 계백장군이었다.

<변평섭 충청역사 유람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