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에 태어나 1991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20세기 거의 전부를 살고 간 분이다. 삶의 전반부는 식민치 치하의 조국을 걱정하며 상해 임시정부에서 안살림을 맡고, 죽음의 고비를 넘기면서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시기였다. 광복된 고국에 돌아와서도 이데올로기 대립과 일제 잔재 청산의 갈등 속에 조국의 영욕을 지켜본 사람, 정정화 여사. 회고록 '녹두꽃'을 텍스트로 구성한 그의 일대기를 연극으로 만난다. 3·1운동과 상해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에 즈음하여 우리는 여성 독립투사 정정화 선생의 파란만장했던 삶을 통해 20세기 현대사의 빛과 그림자를 무대에서 만난다.

극단 독립극장에서 제작한 '달의 목소리'라는 제목의 이 연극<사진>은 같은 주제를 최근 몇 년간 새로운 버전으로 다듬어 계속 무대에 올리는 원영애 배우의 열연으로 관심을 끈다. 수많은 독립투사가 투옥된 서대문형무소 담장을 배경으로 12개의 나무책상과 의자가 단정히 놓인 무대, 이 독특한 장치를 적절히 활용하여 정정화 선생의 고난에 찬 삶이 배우의 다양한 재능으로 펼쳐지고 있다. 서대문 형무소 담장 위로 투사되는 여러 영상은 거친 질감만큼이나 일제강점기 그리고 광복 이후 혼란스러웠던 시국을 역동감 있게 보여준다.

양악과 국악 연주자 3명이 무대 오른쪽에서 들려주는 생음악은 극의 실물감을 증폭시키고 원영애 배우가 보여주는 정정화 선생의 청년, 장년, 노년기 연기에는 중견배우의 연륜이 묻어난다. 그 어느 고비 온전한 날이 드물었던 우리 현대사 한 세기를 한 명의 배우가 어떻게 표현할까 하는 의문은 낭독, 강연, 노래와 연기 그리고 적절히 투사되는 빛바랜 영상자료의 실물감에 힘입어 먹먹한 감정으로 남는다.

1919~2019년, 100년의 우리 현대사를 한 여성독립운동가의 신산한 삶과 올곧은 투쟁의 기록으로 살펴보는 작업은 미시적인 동시에 거시적 관점에서 의미 있다. 가냘프지만 강인했던 정정화 선생의 생애와 발걸음에서 지금 우리가 향유하는 독립과 자유의 소중한 가치와 정체성을 비춰본다.

26일까지 서울 세실극장. <한남대 프랑스어문학전공 명예교수·(사)한국생활연극협회 부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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