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기념관(관장 李文遠)은 국가보훈처·광복회와 공동으로 강재 신 숙(剛齋 申 肅 1885~1967) 선생을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강재 신 숙 선생은 1885년(고종 22년) 경기도 가평군 군내면 향교리에서 신석범(申錫範)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연길이고, 신 숙이란 이름은 1920년 국외망명 때 바꾼 이름이다.

선생은 3·1운동 직전에는 독립선언서의 교정과 인쇄작업을 맡았으며 3·1운동 이후에는 대동단(大同團) 선언의 33인 중 1인으로 임시정부 수립운동을 하다가 체포돼 고초를 겪었다.

선생은 석방되자 1920년 본격적인 독립운동의 뜻을 품고 상해로 망명했다.

상해에서는 천도교의 이념에 바탕을 둔 통일당을 조직하고 당 강령으로 3본주의(민본정치, 노본경제조직, 인본문화건설)를 주창했다.

이후 북경으로 이동해 군사통일회의 의장에 선출되는 등 이 단체를 주도하면서 박용만, 신채호 등과 군사단체의 통일과 무장독립 노선을 걸었다.

1923년에는 국민대표회의에 창조파의 중심인물로 참여해 부의장에 선출됐다.국민회의가 해체된 뒤 창조파는 국호를 '한(韓)'으로 하는 국민위원회라는 독자적인 정부를 세워 내무위원장에 선임된 이후 블라디보스톡, 길림, 하얼빈 등지에서 독립운동에 힘을 쓰다가 이도하자(二道河子) 부근의 송봉산에 정착해 신창학교(申昌學敎)를 설립하는 한편 한인농장 자치회를 조직해 위원장에 선임됐다.

1928년에는 신민부(新民府)의 민정위원이 돼 신민부·정의부·참의부의 삼부통합운동에 참여했다.

만주사변에는 한·중연합으로 중일토일연합군을 결성해 대전자령 전투 등을 승리로 이끌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선생은 재만 한인동포회장으로 동포의 귀국을 도왔다.1967년 가회동 자택에서 지병으로 83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선생은 1963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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