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사림문화의 산실

'기호 예학의 산실', '조선 예학의 1번지' 등등….
유교문화와 관련해 논산을 말할 때 항상 등장하는 수식어들이다.
하지만 왜 이처럼 거창한 수식어들이 논산과 함께하는지 정작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여기에 17세기 이후 한국 유학사와 정치사의 중심지로 호서 유교문화권의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곳이 논산이었다면 믿을 수 있을까.

경북의 안동과 비견되며 한국 유교문화와 선비문화를 집약하고 있다는 논산.
이곳 논산을 얘기할 때 빠지지 않는 화려한 수식어들의 발원지가 되는 곳이 있다.
돈암서원이 바로 그곳이다.


돈암서원은 조선시대 인조 12년(1634년) 논산시 연산면에 창건돼 효종 10년(1659년)에 사액(임금이 사당이나 서원 등에 이름을 지어 그것을 새긴 편액(扁額)을 내리는 것)되었다.

교육의 장소로 제사의 기능까지 담당했던 조선시대 서원으로 돈암서원은 창건될 당시에는 사계 (沙溪) 김장생(金長生)을 주향으로 신독재 김 집과 동춘당 송준길, 우암 송시열 등을 각각 추배했다.

서원이 건립된 계기는 김장생의 제자들이 스승을 추모하기 위해 위패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던 것에서 출발한다.

즉 돈암서원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김장생이라는 조선조 예학에 한 획을 그은 한 인물에 대한 사전 지식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김장생은 예학을 발전시켜 학문으로 성립한 한국 최고의 예학자로 꼽히고 있는 사람으로 이 이 등으로부터 성리학을 배워 예학의 기초를 수립했다.

저서로는 '가례집람'과 '의례문해' 등이 있으며 종래의 가례 수준에 머물렀던 예학을 예의 근본을 정립하는 연구로 심화시켰다는 평을 받고 있다.

특히 그의 문하에서 당대의 걸출한 예학자들을 배출시켜 호서 예학파를 형성하며 기호사림의 적통으로 기호 사림학파 전체의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된다.

때문에 김장생을 제향한 대표적 제향처인 돈암서원은 이후 기호 사림 전체의 구심체로서 그 역할을 맡게된다.

돈암서원의 영향력과 그 비중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우선 고종 8년(1871년) 전국적으로 서원 철폐령이 내려져 전국에 산재한 600여개소의 서원이 일제히 철폐되었을 때도 돈암서원은 보존됐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서원으로는 드물게 불과 1년 만에 두 차례에 걸쳐 사액을 받았다는 점이다.

효종 10년(1659년)에 사액을 받은 돈암서원은 현종 1년(1660년)에 재차 사액을 받은 것이다.

이 당시 돈암서원의 재사액을 요청하는 유생들의 상소가 빗발치자 조정에서 "이미 효종 때 선액되어 중첩되게 사액함은 부당하지만 일대 유종 김장생을 경모하는 여러 선비들의 요청을 가상하게 여겨 특별히 허락한다"며 사액을 내렸다.

이 일을 계기로 돈암서원은 이 일대에서 존숭받는 서원으로서 그 영향력이 멀리 호남지방에까지 미치게 된다.

돈암서원 내에는 유경사와 응도당, 원정비 등의 문화재가 남아 있다.

▲유경사(충남 지정 유형문화재 제155호)
호서 기호학파의 대표적 인물인 김장생과 김 집, 송시열, 송준길 등의 위패를 모셔 제향하고 있다. 정면 3칸과 측면 3칸으로 정면에 툇간을 두는 전형적인 양식이다.

▲응도당(충남 지정 유형문화재 제156호)
서원의 남측에 자리하고 있으며 강당의 기능을 수행한다. 낮은 평지를 조성해 기단을 꾸몄다. 건물의 평면구조를 보면 정면 5칸, 측면 3칸에 맞배지붕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

▲원정비(충남 지정 문화재 자료 제366호)
돈암서원이 건립되면서 김장생, 김 집 부자의 학문을 칭송하고 서원 건립 과정과 각 건물의 구조와 의의를 적은 비석이다. 비신의 높이는 173.8cm로 폭은 74cm, 두께는 33.3cm에 달한다.


건양대 예학교육연구원의 김문준 교수는 지난해 11월 발간된 '논산지역 유교문화 자료 기초조사'에서 "돈암서원은 조선 예학의 산실로 조선조 사림문화를 이처럼 총체적으로 집약해 보여 주는 곳은 없다"고 밝힌 바 있다.

김 교수는 또 돈암서원이 조선 예학의 대표지라는 역사적 상징성 등이 충분한 만큼 예절 교육관과 유교 박물관 건립 등의 선비문화 체험공간으로 개발하는 방안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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