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전한' 백제가 남긴 완전한 걸작

부여는 백제 성왕 16년 부터 멸망에 이르는 6대 123년간 아름다운 터전위에서 굳건한 국력을 기르고, 찬란한 문화예술의 꽃을 피운 서울로 백제의 심장부였다.

계율의 장려를 통하여 불교를 정비하고 사상통일을 기하였으며 대외적으로는 중국의 양(梁)과 일본 왜(倭)와의 관계를 강화하여 대륙에 있는 양나라에서 문물을 흡수하였다.

섬나라 왜(일본)에는 오경(五經), 의(醫), 무(易), 역전사(歷傳士) 등? 여러 방면의 전문기술자를 보내 주었고 불교도 전파해 주었다. 이는 '삼국사기'와 중국 '양사(梁史)'의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 사진=구연길 자유사진가
일본은 이를 계기로 아스까(飛島)문화를 이룩하였다. 일본의 고대문화를 백제문화의 아류(亞流)라고 말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러나 660년 7월13일 나당(羅唐)연합군에 의하여 찬란했던 백제문화는 처참하게 짓밟히고 말았다.

백제는 이렇게 비참하게 망했지만 호사스런 문화를 창조할 때는 모든 사람들이 힘을 합쳤고 발달한 문화를 남의 나라에 전할 때는 온 국력을 다해서 전해 주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문화는 사치스런 인류의 유산이라고 말하지만 백제 사람들 처럼 상냥하고 소박한 문화를 만든 이가 또 어디에 있던가.

백제문화가 잿더미로 변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은 침략자였던 신라군의 철저한 훼손에 의한 것이지만 역사마저 왜곡하여 의자왕은 국정을 내던지고 3천궁녀와 놀아난 방탕한 임금으로 기록하게 되었다. 이런 발상이 백제문화의 회진을 가져왔다.

백제문화가 철저하게 회진된 가운데 살아남은 것은 오로지 정림사 터에 있는 5층 석탑뿐이다. 왕도의 중심에 우뚝했던 절간도 불에 타고 없어졌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의 이름은 아니다.

1917년 이 절터에서 '대평팔년 무진 정림사 대장당초 (大平八年 戊辰 定林寺 大藏當草)'란 명문기와가 발견됨으로써 정림사로 명명되었지만 고고학자 고유섭은 이 절 이름은 백제의 백석사(白石寺)로 추정한다.

백제 왕도가 함락되고 당나라 장수 소정방에 의하여 이 석탑에는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의 전자와 탑신 4면에 1백17행의 전공을 새겨 넣은 글자가 있어 일명 '평제탑(平濟塔)'이라고도 불렸으나 이 이름은 울분이 솟구치는 창피한 뜻을 지니고 있다. 당나라 장수 소정방은 의자왕을 비롯하여 귀족 80여명을 포함, 1만 2000명이 넘는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 당에 보내고 그해 8월 서해를 통해 귀국하였다.

부여정림사지 5층 석탑은 국보로서 그 아름다움이나 모양새, 양식에 있어서 지보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첫째 삼국시대 석탑중에서 완전한 모습을 지니고 오늘까지 남아있는 것은 이것 뿐이다. 둘째 익산에 있는 미륵사지 석탑이 목조건축모방에 충실했다면 정림사지 5층 석탑은 석탑구조가 간결하고 정제한 창조성을 보여준다. 이밖에 백제의 독특한 건축미와 기술을 보여주는 조형미가 뛰어나 석조 조각예술의 우수성을 알려주고 있다.

우수한 백제의 석조 조각술이 신라의 서울에 까지 미쳐 불국사의 무영탑을 백제인이 만든 사실을 짐작해 봐야 한다. 또하나 특기할 만한 것은 정림사에 연꽃을 기른 연지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연못바닥에서 백제유물이 많이 나왔으며 특히 연꽃줄기가 탄화된 채로 나온 것은 큰 수확이었다.

정림사 절터에서 나온 연화문원와당(蓮花文圓瓦當)의 굵고 뚜렷한 꽃잎파리, 부여 외리 절터에서 발굴된 귀형문전 등의 분명한 음양은 '한다하면 하고 안 한다하면 손도 안댄다'는 결기있는 장인정신이 들어있다.

역사의 도시를 취재해 보면 언제나 느끼는 것이 있다. 역사의 도시에서 사는 후손들은 선조들의 슬기와 그들이 이루어 놓은 솜씨를 팔아 먹고 산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여에는 모든 유물이 깡그리 부서졌기 때문에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정림사의 석탑이나 그리고 몇개의 토기와 기왓장, 얼마 안되는 보물들이 백제를 대표할 수는 없다. 백제가 망한 뒤 그 자손인 부여 사람들은 찬란했던 백제문화를 그리면서 그 한을 주체할 길 없어 하면서도 내일의 역사를 충실하게 쌓아 나아가고 있다.

두팔 걷고 발굴과 보전, 그리고 전승에 앞장서는 부여 사람들의 문화감각과 굳은 의지가 기대될 뿐이다. 불타고 회진되었다고 허위단심, 가슴만 칠게 아니라 하나라도 찾아내고 둘이라도 보전하고 셋으로 전승하는 슬기를 길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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