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고도 멸망恨' 금강따라 유유히···

금강은 흐른다.

무주에서 발원한 금강은 장항과 군산을 사이로 마지막 뭍을 바라보며 예나 지금이나 말없이 흐르고 있다.

금강이 역사의 한 페이지에 떠오르게 되는 것은 백제의 웅진 천도로부터 기인될 것이다. 그로부터 장항은 웅진으로 가는 뭍의 첫 길목이었다. 그러나 역사는 금강의 첫 포구인 장항(기벌포)을 기록하지 않았다.

이를 추측해 보면 당시의 사가들은 평범했다는 이유가 아니라 너무 잘 알려져 있어 오랜 세월이 흘러도 누구나 기억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유구한 세월이 흐른 오늘날 우리는 금강의 첫 포구, 즉 LG장항공장이 위치하고 있는 이 곳을 기벌포(伎伐浦)라고 부르고 있다.

장항은 일제시대에 형성된 항구도시로 조선시대 서천군의 남부면과 마길면 지역으로 그 당시 갈대밭을 메워서 만든 시가지와 오랜 역사를 가진 주변 마을로 구성돼 있다.

장항 주변에는 백제시대 서천의 중심 산성인 남산성(영취산성)의 외곽성으로 송내리 산성, 중태산성, 서태산성, 한성리 산성이 있다.

이들 산성의 보호를 받는 백제의 최첨단 군사기지 기벌포를 방어하기 위한 산성이 바로 장암산성으로 백제시대부터 존재하고 있었을 것으로 역사가들은 추정하고 있다.

장항읍 소재지에서 공단 쪽으로 3.5㎞ 떨어진 곳에 LG장항공장이 있는데 서천포 장암산성은 이 곳 정문에서 우측으로 보이는 전망산과 후망산 사이에 위치해 있다.

1995년 충청남도 지정 문화재 제97호로 지정된 장암산성은 조선시대 읍성 쌓는 기법인 잔돌끼움쌓기로 돼 있고 위로 올라갈수록 작은 돌을 사용해 안정감을 준다. 해발 43m의 능선 남단 서쪽 부분이 바다를 향하게 하고 주변에서 돌을 채석해 쌓은 성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좌평 성충이 의자왕에게 극간하다가 옥에 갇혀 굶어 죽을 때 최후의 일언으로 "만일 다른 나라 군사가 쳐들어오거든 육로로는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해야 할 것이옵고, 수군은 기벌포에 적군이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경비를 철저히 해 수군이 기벌포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것만 보아도 기벌포는 백제 말 전략적 요충지였고, 이를 꿰뚫고 있던 성충의 충언을 깨닫지 못한 의자왕의 실수가 나당연합군에 패망하는 계기가 됐음을 알 수 있다.

이 기벌포의 명칭은 고려시대에 긴 바위가 절벽을 이룬 포구라 해서 장암포라 불렸고, 조선시대에는 서천포영이라는 수군 주둔지에서 유래한 서천포(舒川浦)라 불렸다.

서천포 장암진은 백제시대 이래 고려, 조선 말까지 존재해 오던 진으로서 계속해 수축(修築), 개축(改築)해 왔고 문헌상으로 중종 9년(1514년)에 쌓았다고 하는 것은 현존하는 석성을 쌓은 것으로 보고 있다.

성벽의 둘레는 640m로 전체 형태는 190m, 남북 100m로 사다리꼴에 가까운 모양을 보이고 있다. 산성의 바로 앞에 LG금속이 위치해 있으며 동쪽으로는 장항 시가지가 보인다.

구 장항제련소 착공 당시 성의 상당 부분이 훼손됐고 지금은 그 윤곽만 남아 보는 이들로 하여금 아쉬움을 남게 하고 있다.

현재 성의 남벽은 도로에서도 관찰이 가능하며 약 2m 높이로 석축돼 있다. 남서벽은 혼축의 흔적이 보이며 상태가 비교적 양호하게 보전된 동벽은 장대석을 일렬로 배열해 기단석으로 삼고 그 위에 섬돌을 올려놓았다.

남벽과 북벽에 각각 1개의 성문이 있으며 동남부와 북동부에는 성벽에 오르는 적을 측면에서 공격하기 위해 체성 사이에 불룩하게 튀어나오게 한 치(雉)가 설치돼 있다.

성내에는 조선 시대의 와편과 자기편이 산재해 있고 만호 이이남의 선정비가 있어 조선 시대 장암산성이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리고 있다.

내부시설로서 추정되는 건물 터, 당집 터가 있으나 원래는 우물 터도 있던 것을 마을 주민이 매몰했다고 한다.

추정 건물지는 성내의 북동부에 치우쳐 자리하고 있는데 현재는 밭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이 곳에 있던 건물 1채가 인접한 남쪽 대지에 옮겨져 근래까지 제실로 사용됐는데 보호가 되지 않아 무너져 버렸다.

당집 터는 마을 주민의 어로 활동에 대한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던 곳으로 동벽의 성내 북쪽에 치우쳐 현재는 그 터만 남아 있다.

이와 함께 장암이 성안 마을에서 장암산성을 경유하면 후망산 정상에 오를 수 있는데 이 곳에 봉수대가 설치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 역시 현재에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지만 이 곳의 봉화는 다사산과 비인 칠지로 전송됐다고 역사는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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