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寺 적시는 봄비에 속세 번뇌를 씻는다

▲ 아산 영인산 자락에 위치한 세심사는 신라 선덕여왕 때인 645년 자장율사가 창건하고 고려시대 때 중창한 것으로 전해진다.
온양에서 곡교천을 지나 영인면 쪽으로 개설된 도로를 따라 가면 산양리에서 세심사(洗心寺)란 안내판이 나온다.

여기서 약 2㎞를 올라가다 잡나무 숲을 지나면 마당바위와 함께 수백년 된 노송이 군락을 이루고 그 중앙에 세심사가 자리잡고 있다.

세심사가 위치한 영인산(靈仁山)은 산세가 수려하고 주변에 많은 유적이 있으며 산의 정상부에는 산성이 있어 학술적으로도 중요한 평가를 받고 있다.

최근에는 영인산 자연휴양림과 민족의 시련과 영광의 탑을 건립해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고 있다.

세심사는 아산시 염치면 산양리 영인산 자락에 있으며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末寺)이다.

1984년 5월 17일 도 문화재자료 제231호로 지정됐다.

신라 선덕여왕 27년인 서기 645년에 자장율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나 이를 입증할 만한 기록은 없다.

또 사찰 내에서 삼국시대의 역사를 나타낼 만한 유구나 유물이 전혀 확인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1530년(중종 25년)에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조선후기의 여지도서, 범우고 등에 '신심사'(神心寺)라는 이름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조선후기까지 꾸준히 명맥을 이어왔음을 알 수 있다.

현재 경내에 남아 있는 석탑이 전형적인 고려시대 양식을 보이고 있으며 사찰 주변에서 고려시대로 편년(編年)할 수 있는 기와편 등의 유물이 수습되고 있다.

관련 문헌과 유물로 미뤄보면 세심사는 소규모의 사찰로 존재하다가 고려시대에 크게 중창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후 세심사는 조선시대 전 기간을 걸쳐 존속되면서 상당부분 퇴락됐지만 최근에 새로 중수, 성엽 주지스님 외 비구니 스님 8명이 수도 중이다.

영인산은 옛 동림산(桐林山)이었으며 1968년 일타(日陀), 도견(道堅) 두 스님이 절 입구에 있는 '세심당'(洗心堂)이라는 부도에서 이름을 따와 사명을 세심사로 고쳤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을 비롯해 영산전(靈山殿)·산신각(山神閣)·범종각(梵鍾閣)·요사채가 있다.

영인산 남사면 경사둔덕에 3단의 높은 석축(石築)을 쌓아 사역(寺域)을 조성, 그 위에 대웅전과 탑을 중심으로한 요사(寮舍)를 짓고 다시 단을 올려 영산전, 그리고 동편에 산신각, 법당 옆에 범종각 등이 배치돼 있다.

대웅전은 세심사에서 유일한 조선시대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1고주 5양가구(樑架構) 맞배지붕의 단층법당이며 높은 석축단(石築檀) 위에 세워졌다.

전면 3칸에만 사분합문(四分閤門)을 설치, 삼면벽은 막혔으며 후면 처마 밑에 벽을 내어 쌓고 바닥은 우물마루이다.

대웅전 안에는 소조(塑造) 아미타좌상이 봉안돼 있고, 불화로는 영산회상 후불탱화와 신중탱화가 있다.

신중탱화는 1794년(정조 18년)에 조성한 것으로 승초(勝初)·원정(元正)·보심(普心)·품관(品寬)·대운(大云) 등이 그렸다.

영산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2익공계(翼工系)이며 산영각(山靈閣)은 사면단칸의 초익공(初翼工), 홑처마, 맞배집이다.

영산전에는 석가삼존불과 16나한상 및 판관상 1위가 봉안돼 있다.

불화로는 영산회상도와 나한도 2점, 독성도 2점 등이 있다.

산신각에는 1935년에 조성한 칠성탱화와 1937년에 조성한 산신탱화가 있다.

요사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주가(住家)형 개량 한옥으로 전면에는 유리문을 달고 내부에는 아자(亞字)를 넣은 미서기문과 창으로 도시형 한옥민가 모습이다.

부엌과 방, 마루 등으로 구성된 이 집은 2익공(翼工)에 소로로 수장한 겹처마, 팔작지붕이며 목재에 니스를 칠해 사찰 요사(寮舍)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종각은 사면단칸 2익공 겹첨 사모 지붕이다.

도량 외곽에 고풍스런 외관을 보이는 여러단의 석축은 다소 조잡스런 감은 있으나 석축 하부에 자연석 큰 돌을 조화있게 쌓은 것이 고찰다운 면모를 보이고 있다.

대웅전 외의 다른 건물은 최근에 건축돼 전통사찰로서의 품격을 떨어뜨리고 있다.

절의 중심부에는 고려시대에 유행하던 청석(靑石:푸른 빛을 띠는 응회암)으로 만든 석탑(도 문화재 231호)이 있다.

원래는 구층석탑으로 옥신(屋身)이 없었으나 1956년 일타(日陀), 도견(道堅) 등이 옥신(屋身) 등의 새로운 부재를 가미해 현재의 모습으로 고쳐 세웠다.

기단부는 3단이며 재질은 화강암이다.

탑신부(塔身部)는 9층이며 1층 옥신만 4단 판석이고 나머지 옥신은 모두 하나의 판석으로 돼 있다.

옥개석(屋蓋石)의 낙수면은 완만하게 처리돼 있으며 상륜부(相輪部)에는 둥근 점판암을 사용했다. 탑의 전체 높이는 390㎝이다.

부도는 본래 절 입구에 3기가 있었는데 지금은 대웅전에서 영산전으로 오르는 계단 옆에 송매당(松梅堂) 부도 2기만 있다.

이 밖에 1563년(명종 18년)에 판각된 부모은중경 목판과 불교 의식집인 청문판(請文板) 4매가 남아 있다.

특히 부모은중경 목판본 13판은 지난해 7월 30일 도 문화재 167호로 등록돼 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한편 사찰 내에서 수습되는 유물은 기와편 및 토기편, 자기편 등이 있다.

기와편은 모래가 많이 섞여 거칠고 높은 온도에서 구은듯 회흑색으로 두꺼운 형태이다.

자기편은 분청사기편과 함께 백자편이 있다.

분청사기편은 내부에 화문이 시문된 것으로 비교적 정교하고, 백자편은 초기 백자로 굽은 두껍고 높은 편이며 유약이 발라진 사발, 대접 등의 종류가 발견됐다.

토기편은 소형의 옹기편 중 단지형의 형태로 요성도가 높고 다갈색의 색조를 띤 것으로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북부본부 = 정재호·맹주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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