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호 대전시립미술관장

파리의 생라자르역은 시시각각 변하는 빛의 환희를 화폭에 담았던 인상파 화가 모네의 작품의 소재가 됐던 곳이기도 하다. 이 역에서 기차를 타고 한 시간 정도 가다보면 '보 쉬르 센느'라는 아름다운 마을에 도착한다.

한가한 마을 역을 끼고 작은 카페를 지나 큰 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니 언덕 높은 곳에 무언가가 떡 하니 자리잡고 있다. 한눈에도 우리의 전통 한옥임을 알 수 있었다. 안내원에게 물으니 기와나 장판은 물론 나무와 풀 한포기에 이르기까지 모두 한국에서 가져온 것이라 한다. 이곳이 바로 한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살아냈던 고암 이응로 화백의 파리 아틀리에다.

그림만을 알았던 이응로 화백의 불행은 6·25전쟁 때 북한으로 간 아들을 만나기 위해 동베를린에 가면서 시작됐다. 이 일로 인해 그는 반공법 위반으로 2년 반 동안 옥살이를 해야 했다. 이후 프랑스 정부와 전 세계 예술인들의 항의로 특별사면받아 출옥했지만, 그동안의 상처와 고통이 너무도 컸기에 한동안 그는 붓을 들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는 조국을 잊지 못했고 고향의 모든 것을 다 품고 싶어 했다. 아픔보다는 사랑이, 그리움이 더 컸기 때문이었을까. 아마도 상처를 사랑으로 되돌리고 싶었던 이응로 화백의 깊고, 넓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정치나 이념보다는 예술과 사랑을 선택했던 이응로 화백은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 실험과 보수, 현실과 허구 사이에서 언제나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지금은 이 아틀리에를 선생의 실험 정신과 예술적 비전을 함께했던 미망인 박인경 여사가 지키고 있다.

1958년, 이응로 화백은 새로운 그림만 그릴 수 있다면 나이도, 거리도 문제가 되지 않는 곳을 찾았고, 그렇게 해서 서울을 떠나 머나먼 이국땅 프랑스에 정착하게 된다.그리고 당시 프랑스 최고의 화랑이었던 '파케티'의 전속화가로서 독일, 스위스, 미국 등 선진국을 누비면서 한국 문자의 미학을 그림으로 보여주었다. 바로 이것이 1970년대 세계를 사로잡았던 문자추상이다. 문자는 1980년대로 오면서 춤추듯 무희가 돼 화선지 위를 날아다니게 된다. 한 사람, 두 사람, 세 사람, 여러 명이 모여 거대한 군상이 되어버린 이미지는 화면을 넘어서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마구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모네가 그림에서 방법적으로 시간의 문제를 집요하게 추구했다면, 이응로는 그림을 통해 세상의 본질에 다다르고자 했다. 이응로는 모네보다 더 큰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시간을 넘고 현실을 넘어섰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너무나 많은 그림을 이 세상에 남겼다.

그가 남긴 작품들은 미완의 것이 없으며, 작품의 완성도도 뛰어났다. 화가들이 양적으로 많은 작업을 하다보면 어느 부분인가는 미흡한 점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응로 화백의 경우는 이런 공식이 전혀 들어맞지 않았다. 작품의 방대함은 물론이고 도달할 수 없는 경지에 오른 예술미학의 결정체를 보는 것 같아 숨이 멎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응로 화백과의 귀한 만남의 순간을 가지면서 그가 남긴 단 한 조각의 작품도 쉽게 다룰 수 없다는 박인경 여사의 말씀을 이해하게 됐다. 칠순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작품을 일일이 정리하고 목록을 만들고 계시는 박인경 여사. 외롭고 힘든, 그러나 행복한 작업을 하고 계시는 박 여사가 이제 남편의 혼이 담긴 작품들을 우리에게 건네주려고 한다.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는 일보다는 인맥 쌓기에 열중하고, 작품성을 높이기에 앞서 세상에 알리는 것에만 신경 쓰는 오늘날 우리 화단은 혹시 단순하지만 중요한 진리를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화가의 본질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라는 말은 화가는 그림으로 말하며 그림이 삶의 의미여야 한다는 진리의 말이다.

2007년 초 대전에 이응로 미술관이 문을 열게 된다. 하루빨리 이 값진 만남을 대전시민과 나누고 싶은 심정이다. 이응로 화백의 꺼지지 않는 고귀한 예술정신이 고국에 전해지는 그날을 위해 다같이 기쁜 마음으로 준비하면서 기다리자.
저작권자 © 충청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