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직을 떠나 60을 바라보는 초로의 M씨를 며칠전 한 식당에서 만났다. 한동안 보이지 않았던터라 반갑게 손을 잡으며 안부를 물었다. 그랬더니 그는 대뜸 "저 필리핀에 가서 살기로 했어요"하고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

"미국이나 뉴질랜드 이민 이야기는 들어봤어도 필리핀은 뜻밖이네"하고 의아해 했더니 그의 대답은 매우 진지했다.

미국이나 캐나다 뉴질랜드처럼 좋다는 나라는 가고야 싶지만 너무 나이가 많고 기술도, 돈도 없기 때문에 택한 곳이 필리핀이라고 했다.

실제로 그는 필리핀을 오가며 철저히 답사를 했다고 한다. 필리핀 바기오, 앙헬레스등에는 M씨와 같은 한국에서의 은퇴자들이 제법 많이 살고 있는데 무엇보다 돈을 적게 들고 여생을 즐겁게 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집세 40만원정도, 관리비 2만원, 가정부를 고용하면 5만원이면 되고 골프를 10여차례 치는 등 부부가 여유로운 삶을 사는데 월 190만원정도면 된다고 한다.

물론 이 속에는 차량유지비, 전기료, 식생활비, 한국왕래 비용이 포함된다. 초기에 현지에서 차를 구입하고 골프회원권을 구입하는 것 등은 별도.

특히 관광비자로 입국해 살아도 기간이 만료되면 월 5만원을 내면 비자 연장이 가능하다는 게 돈이 많지 않은 샐러리맨 출신들의 입맛을 당긴다고도 했다.

공해 없는 숲의 나라에서 골프 즐기고, 한국을 떠나 온 비슷한 형편의 교민들끼리 바다 낚시도 하며 사는 것은 확실히 '제2의 인생'이 아니냐고 반문했다.

한국에서 너무 빨리 은퇴하여 백수로 살아야 하는 따분함에서 일종의 해방감을 맛본다는 설명이다.

그 '해방감'은 필리핀의 더운 날씨도 상쇄할 수 있고 요즘 우리 정치상황을 보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더욱 좋더라고 했다.

"맥아더 동상을 철거하자는 소리, 동국대 강정구 교수의 해괴스런 소리, 이런 한심한 꼴 안봐서 좋습니다"

M씨는 그렇게 목청을 높였다. 일찍 은퇴를 하고 벌어놓은 돈도 넉넉지 못한 샐러리맨들이 백수로 살면서 받아야 하는 스트레스, 이런 한국적 상황에서 필리핀이 탈출구가 되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M씨는 '해방'을 구가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도피'를 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아무리 우리 정치가 역겹고 아직은 일할 나이에 백수생활하기가 힘들다 해도 내 나라를 떠나야 할 만큼 절박한 것인가. 물론 나라와 사회의 뿌리를 이루며 살아 온 건강한 국민의 노후를 보장해 주지 못하고 이처럼 필리핀으로 보내야 하는 우리의 현실이 안타깝다.

그리고 우리의 정치는 이런 문제(흔히 이야기하는 민생경제)를 뒤로 하고 연정이니 개헌이니 하는 구름잡는 이야기만 계속하는가 하는 것도….

필리핀으로 탈출구를 찾는 M씨의 얼굴이 자꾸만 클로즈업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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