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사 글, 임용운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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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부 帝王 無恥
이상한 所聞(41)

왕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태연히 정무를 보고 경연에도 나아가곤 하였다.
어느 날 경연에서 당(唐) 고종(高宗)의 본기(本紀)를 강하게 되었다.

당나라 고종은 제3대 황제로서 명신(名臣) 장손무기(張孫無忌) 등의 보필에 힘입어 동도(東都) 낙양(洛陽)을 건설하고 영휘율령(永徽律令)을 제정하여 안으로 국력을 충실케 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밖으로는 백제와 고구려를 공략하여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는 등 대내외적으로 국력을 크게 떨쳤다.

그러나 재인(才人) 출신인 무씨(武氏)를 황후로 삼고 말년에 중풍에 걸려 정무를 황후 무씨에게 넘김으로써 한때 나라가 바뀌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측천무후는 제2대 황제인 태종(太宗) 때 재인으로 선발되어 입궁하였는데 태종이 승하한 후에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가 고종이 즉위한 뒤 다시 머리를 기르고 입궁하여 황후가 되었다.

고종 말년에 정권을 잡은 측천무후는 고종이 승하한 후에 중종과 예종을 차례로 폐(廢)하고 스스로 제위(帝位)에 올라 국호를 주(周)라 고치고 21년 동안 군림하다가 재상 장간지 등에 의해 폐위되었던 것이다.

경연관들이 당고종 본기를 강하는 동안 왕은 고종이 참언(讖言)과 교영(嬌影)을 분간하지 못하여 나라를 그르쳤다는 사실에 자신을 돌아보고 가책을 느꼈다.

왕은 그 이튿날 당고종의 실정(失政)을 제목으로 어제시(御製詩)를 한 수 지었다.


?? 臣庸獻戌成陰禍(신용헌술성음화)

君暗牽邪眩是非(군음견사현시비)

若使當時周召在(약사당시주소재)

唐家應免世傳譏(당가응면세전기)


(신하는 용렬해서 아첨을 바쳐 음화를 만들고

임금은 혼암하여 시비를 가릴 줄 몰랐네

만약 그때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이 있었더라면

당나라도 응당 대대로 전하는 비방을 면하였으리.)

왕은 이러한 시를 짓고 나서 입직승지를 불렀다.
입직승지 신용개가 들어와 부복하였다.

"과인이 어제 경연에서 당고종 본기를 강할 적에 측천무후의 일을 보고 느낀 바 있어 절구(絶句) 한 수를 지었소. 승정원과 홍문관에 회람(回覽)케 하고 각각 이 시의 뜻으로 율시(律詩) 한 수씩을 지어 바치게 하오."

왕이 그런 명령을 내린 것은 스스로 반성하는 뜻에서만은 아니었다. 당고종의 고사를 빌어 어느 신하가 왕 자신의 꺼리는 바를 풍간(諷諫)하는가 알고 싶어하는 숨은 뜻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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