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에 울린 '아내의 恨' 극장안 온통 울음바다로

눈물젖은 두만강

김 용 호 작사
이 시 우 작곡
김 정 구 노래

A
두만강 푸른물에 노젓는 뱃사공
흘러간 그옛날에 내님을 싣고
떠나간 그배는 어데로 갔소
그리운 내님이여 그리운 내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B
강물도 달밤이면 목메여 우는데
님 잃은 이사람도 한숨을 지니
추억에 목메인 애달픈 하소
그리운 내님이여 그리운 내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C
님가신 강언덕에 단풍이 물들고
눈물진 두만강에 밤배가 울면
떠나간 그님이 그님이 보고싶구나
그리운 내님이여 그리운 내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눈물 젖은 두만강 이 노래는 앞서 밝힌바와 같이 KBS방송국에서 방송하는 5분 반공드라마 김삿갓 북한방랑기에서 시그널 뮤직으로 나오는 아코디온의 우수적인 음악소리에서 듣는 사람들의 향수를 불러 일으킴으로써 더욱더 이 노래가 국민들의 가슴에 와닿게 됐다.

그리고 이 노래는 이렇게 날이 가면 갈수록 방송의 힘으로 인하여 널리알려지면서 각 유흥업소에서는 무명가수들이 야간업소마다 이 노래를 안 부르는 곳이 거의 없었다. 이렇게 되자 이 노래를 처음 불렀던 김정구씨는 여기에서 힘을 얻어 어느 무대에서든 출연만 하면 으레 그의 구수하고 애절한 특유한 음색으로 눈물 젖은 두만강을 빼놓지 않고 열창을 하면서 관객들을 울렸다.

그리고 만주에 있는 두만강 부근에서 조선악극단이 공연을 할 때 일이다. 김정구씨는무대에 올라서면서 눈물 젖은 두만강을 그의 특유하고 구수한 슬픈 목소리로 애절하게 부르면서 이 노래가 탄생하게 된 배경을 설명까지? 해드리고 당시에 그 여인이 소복을 하고 두만강에 몸을 던져 자살한 그 사연을 관객들에게 소개를 하면서 지금 이사람은 그 때에 자살한 그 여인의 소복한 그 모습이 자꾸만 제 머리속에 떠오르며 제 마음을 이렇게 아프게 한답니다.왜 우리 민족이 어떻게 하다가 이렇게 됐습니까. 하면서 다시 2절과 3절의 노래를 부르면서 김정구씨의 두눈에서는 어느새 눈물이 하염없이 주루룩 주루룩 흐르고 있었다. 김정구씨가 이렇게 무대에서 한 여인의 자살한 배경을 설명하면서 우는 모습을 본 관객들은 누가 먼저인지는모르지만 여기저기서 흐느껴 우는 울음소리가 빠른 속도로 퍼져 극장 안이 울음바다가 돼버렸다. 아니 통곡의 바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렇게 김정구씨의 노래가 중국땅에서 널리 알려지자 조선악극단은 김정구씨의 인기가 날로 좋아지는 것을 알고 조선악극단은 두만강 부근을 돌면서 공연을 계속하게 된다. 그리고 김정구씨가 노래를 잘 불러서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울려준다고 소문이 퍼지자 너나할 것 없이 김정구씨의 얼굴도 보고 그의 슬픈 노래도 듣자고들 하며 모여든다. 극장 안에 입추의 여지가 없이 관객이 꽉 차도록 모여들었다. 역시 김정구씨는 그의 특유한 구수하고 애수띤 목소리로 눈물 젖은 두만강을 부르면서 역시 앞에서 밝혔던 그 여인의 소복한 모습을 상상하며 그의 자살한 동기에 대하여 또다시 설명을 하면서 또 그의 두눈에서는 어느새 눈물이 소리없이 흘러 내린다. 그리고 나라 잃은 우리의 아픔을 호소한다. 그래서 관객들은 김정구씨의 이러한 모습을 바라보며 역시 관객들도 김정구와 같이 따라서운다. 아니 끝내는 통곡을 한다. 그래서 눈물 젖은 두만강은 중국동포는 물론이요 우리 나라에서도 앞서 밝혔듯이 영원한 우리 들의 사랑을 받는 국민의 노래가 아닌지.

이렇게 뒤늦게 이노래가 히트되자 이시우씨와 김정구씨는 그후 한때 콤비가 되어 여러 작품을 노래불렀으나 별다른 히트곡은 없었다. 그리고이시우씨는 1960년대에 동남아레코드회사를 설립하여 후진 양성에 공을 들였으나 별다른 히트곡이 나오질 않고 고생을 하게되며, 레코드업도 잘되지 않았다.????????????

그리고 김정구씨는 이곳 저곳 레코드회사에 노래 취입을 했으나 그도 역시 별다른 히트곡이 나오질 않았다. 이렇게 어려움을 겪게되며 생활에도 어려움을 갖게 되자 김정구씨는 한때 서울을 떠나 부산에서 활동을 하다가 다시 서울로 상경을 하여 가요활동을 하게되며, 그는 악극단에 다시활동을 하며 눈물 젖은 두만강을 잊지 않고 계속 불렀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김정구씨가 이 노래를 계속 부르게되니 이 노래는 우리 국민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노래가 됐다. 이 처럼 이 노래는 우리 대중속에서 없어서는 안될 그야말로 요즘 말로 표현 한다면 국민의 노래가 된것이다. 그리고 이노래는 영원한 우리의 대중 속에 남을 명곡 중의 명곡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된다.

그리고 가수 김정구씨는 어떤 사람인가. 그의 발자취를 살펴보자 김정구씨는 1916년 함경도 원산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김정구씨는 착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4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제일 큰 형이 우리나라에서 만요작가로 유명한 작사작곡가이며, 또 만요를 잘부르는 가수이기도 하며 위로 누님은 김안나라고 일본에서 음악공부를 하여 성악가로 활동을 했으며, 그의 동생인 김정현씨는 김정구씨와 대중가요를 같이 하게 됐다. 그의 누님은 성악가로 활동을 했으나 별로? 인기를 얻질 못하고 끝내는 대중가요계로 들어오게 됐다. 당시에 클래식 음악으로 성공을 한다고 일본에 까지 가서 음악공부를 했지만 현실이 클래식 음악이 그렇게 크게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대중가요로 입문을 했다. 그러나 김안나는 대중가요계에 돌아와서도 인기를 얻질 못하고 클래식 음악인들로부터 오히려 비난만 받는 음악인이 돼 버렸다. 또 김정구의 동생인 정현씨도 대중가요계에 들어와서 성공을 못하고 젊은 나이에 요절을 했으며, 김정구씨와 그의 형인 김용환씨와 형제만 남아서 우리 대중가요계에서 활동을 하게 됐다.

김용환씨는 작사작곡 노래등 가요계에서는 못하는 것이 없는 다재다능한 만년가요인이다. 특히 김용환 김정구 형제는 목소리가 똑같아서 레코드로 듣는 팬들은 누가 형인지 누가 동생인지 분별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리고 김정구씨가 불러서 크게 히트했던 노다지타령 총각 진정서 장기타령 왕서방연서 등 만요가 김장구의 형인 김용환씨의 작품이 그외에도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만요를 비롯하여 트로트 곡들이 거의가 형인 김용환씨의 작품이다.

그리고 김정구씨는 만요를 부를적에는 가사내용에 걸맞게 분장과 의상을 입고 무대에 서서 재롱 부리며 관객을 웃기는 재능이 뛰어난 가수다. 특히 1939년도에 조선악극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가서 공연을 할 때의 일이다. 일본의 한 신문은 김정구씨를 우는 사람도 웃기는 김정구라고까지 보도를 하며 그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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