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관 건양대 교수

문화관광부 장관에 임명된 이창동 감독이 캐주얼 차림으로 청와대에 들어갔다 해서 많은 이들로부터 화제가 됐다. 게다가 레저용 차량에 손수 운전이었다는 것이 이야기의 소재를 추가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자 시절 네티즌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한복을 입고 다녔던 적이 있다. 잘 어울린다는 평가와 함께 젊은 한국인의 자존심을 표현하는 것 같아 무척 시원했다.

같은 미국 대통령인데도 일본을 방문했을 땐 일본 수상과 일본 전통 옷을 입고 일본 차(茶)를 마시는 모습이 화면에 보이는 데 비해 우리는 한복은커녕 어색한 나비넥타이에 벙커나 호텔을 전전하는 모습이 마음을 억눌렀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국제회의에 참석한 각국의 수십명의 정상들이 모두 그 곳의 전통 의상을 입고 일렬로 서 있던 모습을 보며 우리는 왜 그러지 못할까, 선거 유세 시절 그토록 한복을 즐겨 입던 대통령이 한복을 입은 모습을 보여줄 수 없었을까 하는 생각에 서글픔마저 느꼈다.

서슬 퍼렇던 박정희 대통령 시절, 청와대에 초대받은 야당 당수인 김영삼씨가 누구나 가슴에 달아야 했던 이름표를 거부하고 '내 얼굴, 내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겠노'라며 당당하게 들어갔던 적이 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은 말못할 권위의 억눌림에서 잠시나마 벗어나는 듯한 쾌감을 맛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러한 행동들은 나중에 여러 다른 실패한 정책들에 의해 그 의미가 퇴색해 버렸다. 오히려 아쉬운 생각들만 나타날 뿐이었다.

문화는 다양성을 생명으로 한다. 어떤 코드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특색이 나타나고, 어떤 색깔이 반복되느냐에 따라 일정한 이미지로 서서히 표출되는 것이다. 단순하게 캐주얼을 입었다는 것만으로 그 분이나 그 분의 인생을 평가할 수는 없다. 레저용 차를 타건, 세단용 차를 타건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남들이 다 넥타이를 매는데 독불장군처럼 안 매는 모습이 어쩌면 아집으로 비쳐질 수도 있다. 남들이 다 관용기사가 모는 차를 타는데 그 혼자만 손수 운전을 고집한다는 것은 조직의 효율성을 모르는 미숙한 자의 소행으로 비쳐질 지도 모른다.

캐주얼을 입고 6층 빌딩 높이의 청와대 현관을 들어갈 수 있었다는 것은 분명 용기 있는 행동이다. 그런 용기 있는 행동들이 모여 정녕 자연스럽고 본래적인 문화의 코드로 다시 태어났으면 좋겠다. 조금 더 욕심을 낸다면 차라리 한복을 입고 들어갔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레저용 차를 몰고 손수 운전으로 청와대에 들어갔다는 것은 분명 권위나 형식을 거부하려는 그의 선택이었다. 그러한 탈권위적 행동들이 모여 진정한 변화의 색깔들로 나타났으면 좋겠다.

전직교사, 소설가, 영화감독, 대학교수 어느 이력을 봐도 아첨이 배어 있거나 권위가 묻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더 주시하는 것이다.

단순한 한번의 붓질로 큰 폭의 그림이 완성되거나, 단순한 하나의 소리로 교향악의 성패를 가늠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의미 있는 변화의 선택이라면 우리는 얼마든지 인내를 갖고 지켜 볼 일이다.

완성된 한 폭의 훌륭한 그림이나, 웅장한 교향악의 대미를 생각하는 것은 가슴 벅찬 일이다. 하루에도 몇번씩 그런 작품을 만드는 사람들이기에 우리는 기다리고 싶다. '좋다', '다시 한번'을 외치며 손바닥이 아플 정도로 박수를 보낼 준비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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