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안기부 X파일의 위력은 대단했다. 그 끝이 어디인지를 도무지 알 수가 없을 지경이다. 마치 판도라의 그것을 닮았다.

제우스가 인간의 모든 죄악과 희망까지 넣어 판도라에게 주었다는 그 상자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 같다. 과연 그 상자 속엔 뭐가 들어있을까? 끝내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판도라 상자 뚜껑을 열었더니 인간세상으로 온갖 악령들이 쏟아져 나왔다는 그리스 신화를 떠올리게 된다.

결국 국가정보원이 엊그제 검찰로부터 전격 압수 수색을 당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국가 최고 권력기관으로 출범한지 40여년이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더라도 최악의 수치스런 날로 기억될 것 같다. 검찰은 10시간의 수색을 통해 부호분할다중접속방식(CDMA) 휴대전화의 감청용 장비의 사용내역을 확보, 분석중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휴대전화 도청이 실제로 이뤄졌음을 입증할 수 있는 단계로 접어드는 순간이기도 하다.

1999년 "휴대폰 도청은 불가능하니 국민 여러분은 안심하고 휴대폰을 사용해도 좋다"는 정부의 광고도 새빨간 거짓으로 들통 나고 말았다. '카스(CASS)'로 불리는 CDMA방식 휴대전화 감청장비를 사용한 목록을 입수했다는 점에서 주는 충격이 만만치 않다. 박정희 정권 및 신군부 시절에 이어 김영삼 정권에서 도청 및 정치공작이 이뤄졌다는 사실은 상식에 속한다. 국민의 정부인 김대중 정부 시절에서도 주요인사 40~50명을 대상으로 감청했다니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정부마저 믿을 수 없는 세상이다. 국민으로선 배신감을 넘어 허탈감을 감추지 못한다. 전화조차 마음 놓고 사용할 수 없는 세상이라면 무얼 기대할 수 있나. 누군가로부터 감시를 당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의 비극이다. 그런 사회에선 개인의 사생활이나 인권, 그리고 민주주의를 논할 수 없다. 조지 오웰의 정치소설 '1984년'에서 등장한 통제된 사회, 그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오직 독재자가 국민을 통치의 수단으로 조종하고 이용하는 수법만이 통용될 뿐이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국가 공권력을 동원해서라도 정적(政敵)을 옭아매는 비열한 수법도 마다하지 않는다. 야비하고도 비겁한 그 악령이 되살아나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것은 아닌가 모골이 송연해질 따름이다.

그간 도청 의혹이 숱하게 제기됐지만 그 때마다 정부는 "지금의 기술로는 휴대전화 도청이 불가능하다"고 반박해왔다. 보통 배짱이 아니다. 뒤늦게나마 이달 들어서 국정원의 '고해성사'에 이어 정보통신부 장관의 '시인 발언'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상황논리를 주목한다. 참여정부에선 도·감청이 없었다는 설명을 믿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에만 머물지 않는다. DJ 정권 당시 레임덕 현상을 앞당겼던 이른바 '진승현 게이트'는 어떻게 알려졌나. 정가에선 국정원의 도청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게 사실이라면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진실은 아무리 가리려고 해도 결국 그 실체를 드러내게 마련이다. 권력 주변에 기생했던 우리 사회의 추악한 몰골을 확인하자는데 이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 검은 고리가 무얼 매개로 형성됐고, 그게 어떤 불공정 게임을 유발했는지 기필코 밝혀내야 한다. 원칙이 없는 사회, 그건 대다수 선량한 국민의 희생을 강요한다. 공정한 사회 구축을 위해서라도 지난날의 어두운 과거는 청산돼야 한다.

그렇지 않아도 갖가지 폭로정국 속에서 뒤숭숭한 분위기가 지속되고 있다. 급기야는 '떡값 검찰' 파문으로 검찰 고위 간부가 물러났다. 화난 민심을 어떻게 달랠 것인가. 정치권이 솔직하게 고백하고 재발 방치책을 마련하는 데서 찾을 수 밖에 없다. 자그만 삶이지만 가정의 소중한 가치를 일깨우며 이웃과 어울려 소박하게 살아가려는 대다수 국민의 심정을 헤아릴 때도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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