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속 딸 잃은 아픔 그려

단장의 미아리 고개는 1956년도에 발표된 노래다. 6.25란 동족 상잔의 비극을 그린 우리의 참담했던 시대를 그린 노래다. 다시 말한다면 1950년 6월 25일 생각지도 안았던 동족상잔의 비극이 발생한 해이다. 이해 북한에서는 지금의 러시아와 중국을 엎고 우리나라를 침략하여 수많은 우리 국민들을 노소를 막론하고 잔인하게 학살하는 만행을 서슴지않고 저질렀다. 이들 공산주의자들은 러시아와 중국의 힘을 믿고 전쟁을 감행한 것이다. 이들의 만행으로 당시에 우리 희생자 숫자는 국군이 49만 9천명이며 북한군이 29만 4천명, 학살된 양민이 24만 5천명, 행불자가 91만 명이란 엄청난 회생자를 냈다. 이 많은 희생자들은 말이 없다. 이미 고인이 됐으니 무슨 말이 있으랴. 그러나 살아남은 그의 유가족 들은 아픈 심정이 어떠했을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이렇케 전쟁으로 죽지않고 살아남은 국민들은 가족을 잃은 슬픔이 뼈속 깊히 파고드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만 했으니 얼마나 비극이었는지 알만할 것이다. 이렇게 아픔을 견디면서 죽지 못해 사는 그 고통이야 어찌 필설로 다 말할 수가 있으랴. 이런 정황 속에서 발표된 노래가 바로 지금 소개하는 단장의 미아리 고개다. 이 미아리 고개는 현재 서울에 있는 지금의 미아리동이다. 6.25사변 당시에는 얕은 고개로서 묘지가 많았던 곳이다. 그리고 서울에서 북한으로 가려면 이 고개를 넘어야만 하는 길이었다.

그리고 이 미아리 고개에서는 많은 양민들이 학살을 당했으며, 그리고 전쟁 중에는 이곳에서 서울을 고수하고저 치열한 전투를 벌여 우리아군이 많이 회생당한 곳이기도 하다. 이렇게 한이 쌓인 고개다보니 어찌 이곳을 잊을수가? 있으리오. 그래서 한많은 미아리 고개란 노래가 나오지않았나 생각도 해본다. 그러나 전쟁의 상처도 있지만 여기에는 작사자 반야월씨의 아픔도 담겨있는 노래다. 전쟁 중에 반야월씨가 사정이 있어 먼저 피난길에 오르면서 그의 부인과 자녀들에게 뒤따라 바로 내려오라는 그한마디를 남기고 반야월씨는 부산으로 올랐다. 그것이 그의 가슴에 천추의 한이 될줄이야 누가 알았으리. 반야월씨는 그의 부인이 오지 못함을 안타깝게 기다렸으나 아내는 이미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해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다. 반야월씨는 안타까웠지만 아내와 가족들이 무사하길 빌 수밖에없는 상황이 됐다. 이렇게 애간장이 타던 중 9.28수복이 되었다. 이 소식을 전해듣기가 바쁘게 반야월씨는 서울로 급히 올라왔다. 그리고 그의 부인을 극적으로 만나게됐다. 그러나 만남의 기쁨은 잠시뿐 그리고 반야월씨는 그의 부인에게서 기막힌 소리를 들었다. 당시에 수라라는 둘째 딸이 있었는데 그 딸이 죽었다는 것이다. 반야월씨는 그의 저서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전쟁 중에 죽 한 그릇도 제대로 먹지못해 영양실조에 걸려 있던 수라가 미아리고개를 넘어오다가 자욱한 화약연기에 숨을 헐덕이며 애처럽게 죽어갔어요. 그리하여 뼈만 남은 아내의 손으로 4살 짜리 수라를 입은 옷 그대로 싸서 호미로 땅을 파고 언덕에 묻고 고개를 넘어왔노라고. 부인은 반야월씨 앞에 쓰러지며 목이 메이도록 울었고 나도 땅을치며 통곡을 하였다. 이제 이산가요가 된 단장의 미아리고개는 인간의 죄악을 모르던 어린나이에 숨 한번 크게 쉬어보지도 못하고 비명에간 딸 수라의 마지막 모습을 애써 그려보며 비통한 마음 속에서 만든 작품이다. 남편과 아내의 생 이별을 주제로하고 있지만 그 밑바닥에는 수라의 숨결도 깃들어 있는 것이다. 반야월씨는 생전에 세가지의 한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불효자는 웁니다 노래를 취입하고저 일본에 갔을때 어머님의 사망전보를 받고도 귀국하지 못한 죄책감이요. 두 번째는 북한에 가 있는 누님 두분을 만나는 것이며, 세 번째는 불쌍하게 죽은 수라의 생각이다. 그래서 수많은 작품을 발표했어도 단장의 미아리고개는 영원히 내가슴에 한이되어 남아 있을 것이다. 반야월씨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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