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묏자리를 잘 써야 후손이 흥한다.”

풍수가들 사이 좋은 땅은 운명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다고 알려진다. 이곳이 바로 명당이다.

조선시대에도 그랬다. 대원군 이하응은 왕손이면서도 세도를 누리고 있던 안동 김씨 표적이 되지 않으려고 떠다니며 위장 생황을 했다.

때로는 안동 김씨 세도가의 잔치집을 찾아가 허리를 굽혀 술 한잔 얻어 마시며 취한척 비틀거리기도 했다. 그렇게 정적들로 하여금 이하응의 존재를 방심하게 하면서 한편으로는 집권에 대한 강한 집념을 불태웠다.

이하응은 왕이 될 아들을 얻으려고 당대 내노라하는 풍수가들을 찾아다니며 왕을 나을 묏자리를 찾아 다녔다.

그래서 최종 선택된 곳이 지금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산-28번지. 즉 두 명의 왕이 나올 명당이었다.

그러나 이곳엔 가야사라는 조그만 절이 하나 있었다.

대원군은 고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떤 장애물도 그의 집념을 꺾지 못했다.

일설에는 다른 곳에 절을 지어 주기로 하고 태웠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분명치는 않다.

어쨌든 대원군은 경기도 연천에 있는 그의 부친 이구의 묘를 이곳으로 이장했다.

1846년 당시 교통이 좋지 않아 행여로 연천에서 가야산 묘터까지 30일이나 걸렸다.

그곳이 명당이 맞았을까? 7년 후 대원군은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이가 바로 고종 임금이며 명복이라 했다.

복이 열두살 되던 해 철종 임금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오랫동안 준비하고 있던 대원군의 재빠른 작전으로 아들을 왕으로 옹립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그의 손자, 고종의 아들인 순종도 비록 조선의 마지막 왕이지만 왕위에 올랐으니 가야산 동쪽 구릉에 묘를 쓰면 두 명의 왕이 배출된다는 예언은 맞은 것이 아닐까?

왕을 배출한 남연군 묘도 수난을 겪었다.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이 묘를 도굴한 것이다.

오페르트는 조정에 두 번이나 통상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이런 범행을 저질렀다.

젠킨스라는 미국인으로부터 도굴 비용을 지원받고 대원군에 의해 박해받던 천주교도 몇을 동원했다. 그는 조상의 묘를 매우 신성시하는 한국인의 관습을 알고 이를 무기로 통상을 하려 했다는 추측도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사태가 올 것을 예상했던지 남연군의 묘는 삽질을 시작했지만 단단한 석회로 내부를 단단히 꼼짝할 수가 없었다.

여러 시간 곡괭이질을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서해 바다에 배를 대기시켜 놓고 도굴 작업을 벌였는데 썰물 시간이 가까워 오자 모든걸 포기하고 철수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오페르트의 남연군묘 도굴은 도중에 수포로 끝나고 말았지만 그 후유증은 매우 컸다.

이 일을 알게 된 대원군은 대노했다. 대원군의 쇄국 정책은 더욱 강화됐고 천주교에 대한 탄압도 거세졌다.

독일 상인 오페르트에 의한 남연군 묘 도굴사건은 저물어 가는 조선왕조의 또 하나 황당한 해프닝을 던진 것이 되고 말았다.

지금도 이곳에는 1960년대 불탄 제각의 흔적이 있고 남연군 이장 때 사용한 행여가 보존돼 있다. 가야산 동쪽 고즈넉한 구릉에 서면 대원군 이하응의 권력을 향한 뜨겁던 집념이 겨울 바람결에 느껴지는 것 같다.

<변평섭의 충청 역사유람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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