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주형 을지대학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

문화센터 발레수업이 끝나자마자 아이는 배가 고프다고 난리였다. 집에 가서 먹자는 말을 꺼내기가 무서울 정도였다. 아이는 센터 옆 분식집을 가리켰다. 국수와 순대의 추억이 여섯 살 아이의 마음을 사로잡았나 싶어 할 수 없이 그 집으로 향했다.

필자는 한 시간 후 저녁식사 약속이 있던 터라 아이 것만 주문했다. 아이는 다름없이 국수와 순대를 주문했다. 눈앞에 펼쳐진 음식들은 정말 먹음직스러웠지만, 먹고 싶은 욕구를 꾹 눌러야 했다. 아이는 젓가락질이 서툴렀기 때문에 일일이 뜨거운 국수를 후후 불어가며 먹여주었다. 시간이 갈수록 음식들은 먹고 싶은 필자의 욕구를 자극했다. 게다가 맛있게 먹는 아이의 모습이 한 몫 더했다. 한번 맛보고 싶은 마음에 아이에게 먹어 보자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양이 많지 않았을 뿐더러, 아이의 먹는 모습이 보기 좋았고 또 그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 묻지 않았다.

다만 필자는 내심 아이로부터 먼저 먹어보라는 권유를 기대했다. 그러나 기대뿐이었다. 아이는 '왜 이렇게 뜨거워', '물 떠 줘', '반찬도 줘야지', '순대 껍데기는 왜 안 벗겨줘' 등의 주문만 무성했다. 혹시 음식이 남으면 맛이라도 꼭 보리라 굳게 마음먹었는데, 언감생심, 다 먹어버렸다.

서운함이 밀려왔다. 그렇다고 여섯 살 아이에게 아빠 마음을 그렇게 모르냐고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한번 쯤 권할 만도 한데 그렇지 못한 현실이 야속했다. '혼자라도 와서 꼭 먹고 말테다' 다짐하며 자리를 뜨는데 포만감에 젖은 아이가 필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눈빛을 보며 마음을 잠시 달래고는 나도 모르게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맛있게 먹었어? 먹는 모습 보니까 아빠가 다 배부르다."

'새하얀 거짓말'. 갑자기 이 구절이 필자의 머릿속을 스쳤다.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이 차라리 나았을까? 아니면 부모에게 먼저 권해드리는 것이 예의라고 충고해야 했을까? 그랬다면 숨은 나의 욕구를 포장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여러 가지 생각들이 교차했다.

필자는 어릴 적 밥 상위에 놓인 생선 반찬을 유달리 좋아했다. 상 위에 둘러앉은 네 남매는 서로 경쟁하듯 먹었다. 젓가락을 놓는 찰나에 생선 반 토막이 사라지기 때문에 손에 든 젓가락을 상에 놓지 않았다. 밥을 숟가락에 담아 먹는 순간에도 눈은 좋아하는 생선 반찬을 향해 있었다. 당연히 네 남매 중 한 아이도 '이것 드세요' 라는 말을 부모님께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 우리들의 모습을 보시면서 어머니는 '너희들이 먹는 것을 보니 내가 다 배부르다'고 자주 말씀하셨다. 뿐만 아니다. '진짜 맛있는 건 생선 머리인데 이 맛을 모르냐' 하시면서 몸통은 건드리지 않고 생선 머리만 깨끗이 먹어 치우시곤 했다. 어머니 말씀은 진심이었을까? 감히 확신하건대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함께 식사를 하시던 아버지는 젓가락을 생선에 갖다 대지 않으셨다.

필자는 당시 아버지가 생선을 좋아하시지 않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시간이 흘러 한 번은 아버지가 즐겨 가시던 인근 식당에 간 적이 있다. 조그마한 식당이었는데 메뉴는 갈치구이와 시레기국이 전부였다. 아버지가 갈치구이를 아주 좋아하신다는 사실을 필자는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부모의 마음은 다 똑같은가 보다. 자녀들이 먹는 모습만으로도 배부른 감정 말이다. 먹고 싶은 마음은 있어도 자녀들이 먹고 있는 반찬에 쉽사리 젓가락을 대지 못하는 것은 그 모습이 사랑스럽고 보기 좋아서 그런 거지 배고프지 않거나 먹기 싫어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난 이제야 깨닫는다. 어디 먹을거리들만 그럴까?

올해도 어김없이 어버이날을 보냈다. 찾아뵈었어야 하는데 죄송하다고 말씀드리면 여전히 부모님은 그러신다. "뭐 하러 멀리까지 와, 바쁜데 전화만 주면 그걸로 됐지."

지금은 확실히 알게 된 것 같다. 적어도 이 말속엔 새하얀 거짓말이 숨어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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