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평섭의 충청역사유람] 25 충남의 첫 도로 개설
포드 받은 박중양, 도로 없어 고민
박, 데라우찌 총독에 도로개설 건의
공사 1년 6개월… 1913년 9월 개통
충남 운전면허 1호 주인공 문갑동
버스로 성공… 초대 대전상의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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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2년 사업비 87만원이 투입돼 건설된 공주~대전 간 직통도로. 충남도 제공
한일 합방 이듬해, 그러니까 1911년 4월, 데라우찌 조선 총독은 전국 도장관(지금의 도지사)들에게 승용차를 한 대씩 보냈다. 까만색 구형 포드로 지금은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그 당시로서는 최고의 멋진 세단이었다.

그러나 충남 도장관 박중양은 그 귀한 차를 당시 도청이 있던 공주에 그대로 묵혀 두었다. 그 차를 운전할 기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동차가 달릴 만한 도로도 없었다. 박중양 도장관은 공주에 사는 崔모라는 사람을 서울에 보내 운전을 배워 오게 했는데 그 기사가 교육을 받고 올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충남에서 최씨는 제일 먼저 자동차 운전을 배운 사람이 됐다. 그러나 그는 도장관의 독촉이 심하여 총독부에서 발행하는 운전면허증을 받지 못하고 급히 공주로 와서 도장관 차를 운전했다. 그러니까 '무면허' 운전을 한 셈이다.

그러면 충남에서 운전면허 1호는 누구일까? 崔씨와 함께 서울에 가서 운전을 배운 사람 중에는 문갑동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함께 갔던 崔씨가 면허증도 따지 않고 운전만 배우고 공주로 내려 온 것과는 달리 끝까지 서울에 남아 면허증을 땄다. 그래서 충남 운전면허 1호는 문갑동 씨가 차지했다. 이렇게 시대의 흐름을 볼 줄 아는 사람에게는 행운도 뒤따른다.

충남도 박중양 도장관은 고급 승용차를 갖게 되니 어디든 마음대로 달리고 싶었다. 그 첫째로 꼽히는 곳이 대전이었다. 대전은 그 무렵 일본 거류민들이 늘어나면서 활발하게 발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1910년대만 해도 대전~공주 간 도로가 없었다. 공주에서 대전을 오려면 나룻배를 타고 금강을 건너 지금 정부청사가 있는 세종시(당시 종촌)로 해서 대평리~유성을 거치는 좁은 길이 전부였다.

그래서 박 도장관은 데라우찌 총독을 찾아가 공주~대전 도로개설을 간곡히 건의했다. 하지만 공사비가 무려 87만원이나 소요되어 총독부로서도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충남도청 신축비가 35만원이었는데 도로 개설비가 87만원 이었으니 얼마나 큰 사업이었는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결국 총독부는 도로개설의 필요성을 공감하고 1912년 3월, 공주~공암~반포~유성~대전 도로개설 착공을 하기에 이르렀고, 공사 시작 1년6개월 만인 1913년 9월 17일 개통식을 갖게 되었다. 이것을 기존의 길이 아닌 새로 만든 넓은 길이라 하여 사람들은 '신작로(新作路)'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 도로를 만들 때 제일 힘든 구간은 '마티'고개였다. 이 무렵 지금은 믿어지지 않겠지만 화전민(火田民)이 마티 고개 지역 산속에 많이 살았는데 이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특히 공사 중 터뜨린 다이너마이트에 화전민 5명이 죽는 사고까지 발생하여 1개월 동안 공사가 중단되기도 했다.

어쨌든 이렇게 하여 공주~대전 간 도로가 개통되자 재빨리 문갑동 씨는 충남에서 처음으로 버스 영업을 시작했다. 공주~대전 간 정기 버스를 운행한 것이다. 처음에는 자기가 직접 버스를 몰았고 승객이 늘어나자 운행횟수를 늘리고 운전기사도 하나 둘 증원을 하기 시작했다.

행운은 기다리는 사람에게 돌아간다. 충남 운전면허 1호를 획득할 만큼 자동차 시대를 예견한 그는 대전~공주 버스 운행으로 엄청나게 돈을 벌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초대 대전 상공회장까지 오를 수 있었다.

<전 세종시 정무부시장·충남역사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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