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병국 충남도의회 의장

1919년 3월 1일 7대 도시에서 열린 독립만세운동은 같은 해 5월까지 충남을 비롯한 전국에서 들불처럼 번졌다. 남녀노소, 계층과 종교, 이념을 뛰어넘어 당시 전 국민의 10%에 달하는 200만여명이 참가해 7500여명이 희생되고 4만 5000여명이 일제에 붙잡혔다고 한다.

3·1운동은 일제의 폭압을 걷어내고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대규모 민족적 항거로, 세계사에서 유례가 없는 민족운동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 3·1운동은 비록 그 뜻을 이루진 못했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 탄생으로 이어진다. 이같은 이유로 제헌헌법은 전문에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이 건립됐다고 명시했고 현행 헌법도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밝히고 있다.

3·1운동과 임시정부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뿌리인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충남이 있었다. 충남에서의 3·1운동은 3월 2일 논산과 부여에 독립선언서가 배부되면서 급속하게 확산됐다. 그 해 4월말까지 15개 군 256개리 372개소에서 339회 이상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됐다. 충남에서는 특히 밤에 산에 올라 횃불을 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는 봉화만세운동이 동시 다발적으로 펼쳐졌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3·1운동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나 이미지'를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43.9%가 유관순 열사를 꼽았다고 한다. 유관순 열사는 이화학당 재학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학생들과 만세시위를 벌였다. 학교 휴교로 고향인 천안에 돌아와서는 아우내 장터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해 체포되고 고문 후유증으로 이듬해 옥사했다. 3등급인 독립장에 머물던 유관순 열사의 서훈이 최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으로 승급된 것은 뒤늦게나마 합당한 결정이라고 생각한다.

역시 천안 출신인 석오 이동녕은 1919년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그는 의정원 의장, 내무총장, 국무총리 서리, 대통령 대리, 국무령, 주석 등을 역임하며 임시정부를 앞장서 이끌었다.

홍성 출신 만해 한용운은 3·1운동 때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공약삼장을 추가 작성했다. 청산리전투로 유명한 백야 김좌진 장군은 만해와 같은 홍성 출신이다.백야는 3·1운동 때 중국 동북 지방으로 가 북로군정서를 조직해 총사령관이 되고 사관 양성소를 세워 군사를 훈련시켰으며 청산리전투라는 한국 무장독립운동 사상 가장 빛나는 전과를 올렸다.

예산 출신 매헌 윤봉길은 23세 때인 1930년 6월 '장부출가 생불환'이라는 글을 써놓고 중국에 망명했다. 1932년 4월 상해 홍구공원서 열린 일본군 기념식에서 매헌은 폭탄을 투척해 일본 주요 인사들을 대거 죽거나 다치게 하며 한민족의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알렸다.

이외에도 충남의 독립운동가로는 천안 출신 조병옥 박사와 태안 출신 옥파 이종일, 서천출신 월남 이상재 등이 있으며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까지 하면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앞서 언급했지만 3·1운동의 정신은 평화와 국민 화합, 민주주의에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황제의 나라'에서 '국민의 나라', 민주공화국 시대가 시작됐음을 안팎에 알렸다.

그 후로 100년. 대한민국은 최빈국에서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으로 도약했다. 세계인들의 가슴에 한류가 요동치며, 백범 김구가 꿈꿨던 문화대국으로도 발돋움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아직도 풀어야 할 과제가 많다. 일제 잔재가 사회 곳곳에 남아 있고, 해빙 분위기는 일고 있지만 분단은 70년 이상 지속되고 있다. 사분오열된 국론과 심화되고 있는 양극화, 양질의 일자리 부족으로 인한 청년실업, 저출산과 고령화 등의 문제도 산적해 있다.

3·1운동과 임시정부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시작이었고 100년 동안 이를 발전시켜 온 기간이었다면, 앞으로의 100년은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새로운 미래를 열어 나아가야 한다. 나라가 어려움에 빠졌을 때, 충남은 언제나 그 중심에 서 왔음을 다시 한 번 가슴에 새길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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