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유정 상지초등학교 교사

학교에 있다 보면 종종 손주를 위해 학교를 방문하시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뵙게 된다. 그분들을 뵐 때면 나도 늘 우리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생각이 난다. 두 분과는 내가 어릴 때엔 서먹서먹했던 것 같은데, 오히려 성인이 된 이후로 어느 순간 쑥 가까워 진 느낌이다. 구순이 훌쩍 넘으신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언제나 나의 자랑거리이다. 두 분이 건강하신 것도, 서로 애틋하고 다정하신 것도 여기 저기 자랑하고 싶어 죽겠다. 두 분은 장날이면 꼭 손을 잡고 함께 장을 보러 나가신다. 오랜 기간 한 동네에서 지내시며 꾸준히 손을 잡고 장을 보신 덕에 그 동네 사람들은 다 알아보시는 워너비 커플이다. 그런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 한 달에 두 세 번 데이트를 하는데, 매번 동네 분들이 알아보시고는 내게도 인사를 해 주신다. 그럴 때마다 어깨에 힘이 딱, 들어가는 것이 기분이 참 좋다.

언젠가는 감기에 된통 걸려 명절임에도 불구하고 두 시간 거리의 부모님 댁에 가지 못한 적이 있다. 명절 날 아프면 서럽다며 친구 한 명이 와서 간호를 해 주었는데, 그 소식을 들은 구순 할아버지께서는 아픈 손녀딸은 가엾고 간병하는 친구에겐 고맙다며 그 친구 몫까지 고기를 사서 두 손에 꼭 쥔 채 버스를 갈아타며 한 시간을 달려오셨다. 그 날 친구는 구순 할아버지의 손녀 사랑에 감탄하며, 죽만 겨우 넘기던 내게 무조건 씹어 삼키라며 고기를 구워 먹였다.

두 분은 항상 니가 시집을 가면 너희 사촌 오래비들에게 해 준 것 보다 더 많은 축의를 하고 싶은데 왜 시집을 안 가냐고, 시집 좀 가라고 몇 년째 잔소리를 하신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할아버지 같은 남자를 못 만나서 시집을 못 간다고 핑계를 댄다. 그럼 할아버지께서는 예끼 이놈아 하시면서도 좋아하신다.

전에 근무하던 학교는 외가댁 바로 앞에 있었다. 같은 동네에 있는 학교에 첫 발령을 받아 근처에서 근무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두 분께서는 나 보다 더 기뻐하시며, 이제 자주 볼 수 있겠구나 하셨던 것이 기억난다. 그리고는 그 곳에서 5년 만기 근무를 마치고 떠날 때, 이제 어디로 가냐며 멀리 가면 자주 보기 어렵겠다고 서운해 하시던 모습 역시 선명하다. 더 자주 찾아 뵈려 다짐했지만 역시 맘처럼 잘 지켜지지는 않는다.

얼마 전에는 갑자기 전화를 하셔서 "내주가 니 생일이던데 한번 들려라 할아버지가 고기 사줄게" 하시기에 냉큼 약속을 잡았다. 비싼 것 얻어먹을 거라며 어깃장도 놓았다. 평소엔 주로 칼국수나 냉면, 국밥 같은걸 먹는데 오늘은 무려 오리 누룽지탕을 사주셨다. "이것도 건강에 도움이 되냐?" 하시기에 "그럼요, 할아버지. 이것도 복날 먹는 보양식 중 하나잖아요" 했더니 "그럼 자주 오자, 느이 할머니 맛있게 잘 먹네"하시기에 또 가슴이 설렜다. 역시 우리 할아버지, 멋진 남편!

그런 할아버지께서 오늘 꽃을 보시더니 문득 "이게 마지막 꽃일지도 모르는데 많이 봐둬야지, 오늘 참 날씨 좋다"하셨다. 눈물이 핑 돌았다. 할머니는 벌써 이십년 전 부터 비슷한 말씀을 하셔서 할머니가 하시는 말씀에는 이제 면역이 되었다. 하지만 할아버지께서 그런 말씀을 하신 건 이번이 처음이라 진심으로 느껴졌다. 두 분의 기억도 건강도 예전 같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이 나 뿐은 아니었나 보다. 할아버지께서 얼른 덧붙여 "그렇게 생각하면 맨날 보던 게 괜히 더 좋아 보여, 더 예뻐 보이고" 하시며 털어버리시기에 나도 그냥 웃으며 "남들보다 더 예쁜 걸 보면서 어떻게 올해만 보고 말아, 내년에도 후년에도 더 보셔야겠네" 하고 넘겨버렸다.

백세시대란다. 인간 수명이 너무 길어서 문제라는 말이 나오는 시대라는데, 나의 두 분께 백세는 좀 짧다. 나는 앞으로도 오래 오래 할아버지께 비싼 생일 밥을 얻어먹고 싶다. 내년에도, 후년에도 올해처럼 작년처럼 같이 꽃 보러가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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